華西 李恒老 선생 시비 次龍門 시를 소개합니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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華西 李恒老(화서 이항로, 1792-1868)선생은 불유사승(不由師承 - 스승이 없이 공부를 하였으며)하고 孔子, 朱子, 宋子의 道統을 계승한 儒林宗師요 선각자이시다. 서종면 노문리 벽계마을 靑華精舍에서 수많은 제자들에게 도학과 의리를 강론하며 衛正斥邪를 주창하고 한국 근대 민족운동의 근간을 이루었습니다.
선생은 경기도 양근현(楊根縣) 벽계리(蘗溪里) (지금의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노문리 벽계마을)에서 벽진이씨(碧珍李氏) 우록헌(友鹿軒) 이회장(李晦章)의 2대 독자로 출생하였습니다.
조선말기 正直과 志操를 지닌 화서 선생은 의리와 고결한 선비상의 사표(師表)로서 부정과 불의를 간과하지 않았으며 나라가 위기에 처해서는 국가와 도의와 백성을 걱정하는 마음이 간절했던 선비였습니다. 때문에 물리적 불법적인 외세에 의하여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에는 도피하지 않고 현실에 참여함으로써 구국 민족운동의 효시를 이루는 선구자로 추앙되는 분입니다.
마치 임진왜란 시 다수의 의병장을 배출한 南冥 曺植 선생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는 內明者敬 外斷者義 문구를 敬義劍에 새기고 더하여 惺惺子를 허리에 차고 항상 자신을 敬과 義의 범주 안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깨우친다는 가르침 따라 남명 선생의 제자들 가운데 많은 의병장들이 배출되었다는 이야기이지요.
유학자인 화서(華西) 선생은 3세 때 천자문을 배우고 6세 때 『19사략(十九史略)』을 읽을 정도로 학문에 밝았습니다. 또한 9세 때 부친 우록헌이 당세의 학자들과 함께 경사(經史)를 논할 때 주리론(主理論 )을 설파하여 좌중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선생은 일평생 주자집주(朱子集註)와 우암 송시열의 송자대전(宋子大全)을 반복 독서하여 그 사상적 깊이를 더해 자신만의 독자적 이론을 구축하였다. 선생의 학문적 핵심이 되는 주리(主理)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은 이(理)와 기(氣)는 엄연히 다른 두 개의 개념으로서, 이는 완전한 선(善)이고 기는 선과 불선(不善)으로 나뉘어 있고, 기는 이에 종속됨을 분명히 하였다. 이러한 從屬 관계가 순조롭게 유지되느냐의 여부에 따라서 세계 질서가 순탄하게 진행되거나 파괴되기도 한다. 이 이론은 조선왕조의 정통적 질서와 서양세계의 제국주의적 침략 간의 긴장 관계를 설명하는 주요한 배경이 되었습니다.
화서 선생은 정직(正直)은 사는 길이요, 사곡(邪曲)은 죽는 길이라고 하여 민족의 정체성을 강조하여 위정척사(衛正斥邪)의 강력한 실천이 도(道)를 실천하는 방법임을 제자들에게 가르친 것입니다. 또한 그 정통성이 조선에 남아 있기에 세계사의 중심문화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이것은 자기 생존을 위한 문화적 자존의식으로 1866년 프랑스함대가 침범한 병인양요(丙寅洋擾)에 항전하였으며 아울러 오륜을 모르는 서학(西學)을 배격한 것입니다.
화서 선생은 승정원 동부승지로서 조선이 앞으로 자주적으로 나아가기 위해 설정해야 하는 목표를 뚜렷하게 제시하였다. 선생의 사상을 흠모하고 따르며 유교의 전통을 지킬 것을 주장한 선비들은 보국양이(保國攘夷)와 위정척사(衛正斥邪)로 민족의 정통성을 살리려고 노력했다. 이론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실천의 영역에서도 선생이 남기신 정신을 계승한 제자들이 수없이 많았습니다.
경기도 포천의 중암(重菴) 김평묵(金平默, 1819-1891), 강원도 춘천의 성재
(省齋) 류중교(柳重敎, 1832-1893), 평안도의 운암(雲菴) 박문일(朴文一, 1822-1894), 대마도에서 아사순국(餓死殉國)한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1833-1906), 근대 항일 의병운동의 상징적 인물 의암(義菴) 류인석(柳麟錫, 1842-1915), 병인양요 때에 불란서 함대를 격퇴한 하거(荷居) 양헌수(梁憲洙, 1816-1888) 등 충효, 절의, 문장 등 약 450여 명의 문하생이 배출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이들 중에는 스승과 같이 강학(講學) 활동을 통하여 수많은 제자를 양성하였으니 전국에 8천여 명에 이르는 방대한 화서학파(華西學派)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그 연원(淵源) 가운데는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 1859-1925), 하얼빈에서 이토히로부미와 그 일행을 사살한 안중근(安重根, 1879-1910)의사, 안중근에게 권총과 거사 자금을 준 이진룡(李鎭龍, 1879-1918), 임시정부 주석으로 무장 독립 투쟁을 주도한 백범(白凡) 김구(金九, 1879-1949) 등 화서학파 1천 여명이 한국 근대 항일구국운동에 동참하였고 그 중에 약 1백여 명이 순국. 순절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화서 선생을 추모하기 위한 모임으로 1903년 문인 최익현, 류인석 등이 유림과 더불어 화서선생의 후사(後事)를 위하여 강수계(講修契)를 조직하였으며, 1943년 후학 김두운, 양명규등 평안도 선비들과 외예(外裔) 장기덕(張基德)등이 선생의 묘소에 묘표와 상석을 갖추었으며, 1954년 계유년에 강수계의 뜻을 받들어 외예 장기덕이 사재를 내고 사림(士林)의 협조를 얻어 노산사(蘆山祠)를 창건하였다. 화서 선생의 출생지에 위치한 노산사는 1977년 경기도 지방문화재 제43호로 지정되었으며, 1980년 선생의 구택(舊宅)이 경기도 지방문화재 제105호로 지정되었으며, 2000년에는 벽계강당(蘗溪講堂)과 화서기념관(華西紀念館)이 건립되었고, 2001년 사단법인 화서 학회가 창립되어 선생의 업적과 사상에 대한 본격적이고 체계적인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詩 한 首를 통해 화서 이항로 선생을 알게 되고 당시에 선비들은 보국양이(保國攘夷)와 위정척사(衛正斥邪)로 민족의 정통성을 살려 외세에 흔들리는 민족과 나라에게 위국 충정의 길을 안내하였음을 알게 됩니다.
2025년 4월 22일
천승지회 최 종 만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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晩塾님의 댓글
望龍門山 용문산을 바라보며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縹渺龍門色 저기 멀리 어렴풋한 용문산의 그 풍광이
終朝在客船 아침 내내 나그네의 배 주변에 머물렀네
洞深惟見樹 골이 깊어 그저 오직 보이는 건 수목인데
雲盡復生煙 구름들이 걷히더니 다시 안개 피어나네
早識桃源有 내 일찌기 무릉도원 여기 있음을 알았지만
難辭紫陌緣 속세와의 인연들을 저버리기는 어려웠지
鹿園棲隱處 숨은 듯이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절에서
悵望好林泉 아름다운 숲과 물을 하염없이 바라보네
⁕ 시제 “望龍門山 용문산을 바라보며” 내용은 위에 시 8구 悵望好林泉 아름다운 숲과 물을 하염없이 바라보네“ 통한 것 같습니다. (龍門山을 林泉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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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茶山 丁若鏞先生은
정약용은 1762년(영조 38) 마현(현재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5남 3녀 가운데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丁載遠(1730~1792)으로 押海丁氏이고, 어머니는 해남 윤씨海南尹氏(1728~1770)이다.
정약용은 어려서부터 영리하고 공부를 잘했다고 한다. 7세에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니 멀고 가까움이 달라서라네[小山蔽大山 遠近地不同]”라는 시를 지었는데, 부친인 정재원은 수학과 과학에 재능이 있을 것이라고 칭찬하였다.
정약용은 20세를 전후해 과거공부에 본격적으로 힘을 기울였으며 22세에 과거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이때 정조 대왕을 만나 총애를 받게 된다. 23세 때 고향 마현에서 배를 타고 서울로 가는 도중 두미협을 지나며 이벽으로부터 서양의 학문과 종교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큰 감명을 받았다. 정약용은 28세에 드디어 대과(문과)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나아갔다.
정약용은 28세 때 벼슬에 나아가 정조가 인재 선발을 위해 세운 규장각에서 교육 및 연구과정을 밟는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발탁되는 등 정조의 총애 속에서 재주와 능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그의 재능을 시기하고 미워하는 세력의 정치적 공격이 고조되어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정약용은 1800년(정조 24) 39세 봄에 처자식을 거느리고 고향 마현으로 돌아왔지만,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정적들의 공격은 더욱 거세져갔다.
1801년(순조 1) 천주교 신앙의 전파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정적들이 일으킨 신유옥사辛酉獄事 때 정약용은 유배를 가게 된다.
정약용은 유배기간 동안 좌절하지 않고 역경을 기회로 바꾸었다. “이제야 참다운 공부를 할 수 있는 시간을 얻었구나!”라고 하면서 학문과 저술 활동에 열중했다.
정약용은 유배 초기에 4書 6經에 대한 연구에 매진하였고 1818년 解配(귀양생활에서 풀려남) 되기 전 마지막 기간에는 경세학經世學 연구에 몰두하여 《經世遺表》·《牧民心書》를 저술하고 해배 되어 돌아온 다음 해 《欽欽新書》를 완성하였다.
정약용은 학문 이외에 문학적 성과도 매우 뛰어났다. 수많은 서정시 및 사회시를 지어 19세기 초반 조선의 풍속과 세태를 읊으며, 압제와 핍박에 시달리던 농어민의 참상을 눈물어린 시어로 대변해 주었다.
18년의 유배 생활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온 정약용은 평생 지은 저술을 계속해서 수정 보완하는 한편, 소론계의 석천石泉 신작申綽, 노론계의 대산臺山 김매순金邁淳, 연천淵泉 홍석주洪奭周,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등과 같은 당대 석학들과 학문 교류를 통해 19세기 학술사의 큰 업적을 남겼다.
정약용은 자신의 회갑 때,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을 썼는데, 여기서 자신의 호를 사암俟菴이라 했다. 이는 “백세 이후 성인을 기다려도 미혹됨이 없다[百世以俟 聖人而不惑]”에서 따온 이름이다. 정약용 선생의 학문적 자부심이자, 훗날에 대한 기다림과 기대로 해석되기도 한다.
|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산75-1번지에 있는 다산선생 묘이다. 선생의 생가 與酉堂 뒷산자락에 묘가 있는데 묘비에 淑夫人豐山洪氏 文度公茶山丁若鏞之墓로 보통의 소박한 작은 合葬墓原이다. 전통적으로 紙榜이나 묘는 左考 右妣, 男左女右로 순서하나 비문은 문서의 순으로 다산 선생이 우선이어야 하는데 숙부인이 우성으로 입비 되어있다. 다산의 뜻인지 후예들의 다른 뜻이 있는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나의 蛇足입니다. (文度는 다산의 諡號임) |
2025년 4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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