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유도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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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유도 연혁
✤. 仙遊詞 허 난설헌(許 蘭雪軒, 1563~1589) 仙遊詞 연작시중 76째
一春閑伴玉眞遊 봄 한철 한가롭게 옥진(신선)과 놀았는데
倏忽星霜已報秋 어느새 세월이 흘러 벌써 가을이라네.
武帝不來花落盡 무제는 오지 않고 꽃도 다 져버려
滿天烟露月當樓 하늘에는 노을이 깔리고 달이 다락에 다가오네.
倏 : 문득 숙, 갑자기 숙 허난설헌의 <유선사(遊仙詞)>란 연작시 87수 중 76번째 시인데, 신선의 세계도 세월은 흐르며, 자연도 변화함을 노래하고 있다. 신선이 놀던 곳이라고는 하지만 인간세계인 이상 변화는 당연한 것이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는데, 산봉우리였던 선유봉(仙遊峰)이 세월이 흘러, 선유도(仙遊島)란 섬으로 바뀐 것이다. |
✤.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
공무도하(公無渡河) 님아 물을 건너지 마오
공경도하(公竟渡河) 님은 결국 물을 건너시네
타하이사(墮河而死) 물에 빠져 돌아가셨으니
장내공하(將奈公何) 장차 님을 어이할꼬.
고조선(古朝鮮) 때의 노래. 백수(白首) 광부(狂夫)가 강을 건너다가 빠져 죽자 그의 아내가 이를 한탄(恨歎ㆍ恨嘆)하면서 불렀는데, 이를 곽리자고(霍里子高)가 듣고 그의 아내 여옥(麗玉)에게 들려주자, 여옥(麗玉)이 공후(箜篌)를 연주(演奏)하면서 곡조(曲調)를 만들어 불렀다는 기록(記錄)이 중국(中國) 진나라(晉--) 최표(崔豹)의 ≪고금주(古今注)≫에 전(傳)한다. |
선유도는 본래 선유봉이라는 40여m 높이의 작은 돌산이었습니다.
신선들이 노니는 곳이라는 이름답게 매우 아름다운 산으로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의 찬탄(讚歎)을 자아내는 자연풍광으로 한양의 관료들과 선비들은 물론 중국에서 온 사신들도 유람해보고 싶어 하는 명소의 하나였습니다.
배를 타고 한양으로 들어오면 선유봉을 화표주(華表柱)로 여겼다. 경승지 찾아 풍류를 즐기던 중국 사신들도 그 풍경에 감탄하면서, 수많은 시를 짓고 읊었다 하며, 특히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선유봉 암석의 꿋꿋함을 칭송하여 중국 황하의 지주봉(砥柱峰)을 견주어 말하고 암석에 砥柱라고 새기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풍류객들은 강상풍월(江上風月)을 감상하며 아예 이곳에 누각이나 정자를 지어 기거하면서 선유봉 주변 한강 뱃놀이와 풍치를 즐겼다고 합니다.
왕위를 세종에게 양보하고 명산대천(名山大川)의 자연풍경을 즐겨 찾았던 양녕대군(讓寧大君)은 말년에 이곳에 영복정(榮福亭)을 짓고서 한가롭게 지냈다 합니다.
조선시대 대표적 화가 겸재 정선(謙齋 鄭敾)은 1740년 -1745년 양천현령(陽川縣令)을 지내면서 선유봉을 배경으로 양화환도(楊花喚渡) 금성평사(錦城平沙), 소악후월(小岳候月) 등 3편의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를 남겼다.(京郊名勝帖) 33첩 중 3첩)
1899년 경기양천군읍지지도(京畿陽川郡邑誌地圖)에는 곽리자고(霍里子高)의 처 여옥이가 양화도(선유도)에서 사람이 빠져 죽는 것을 보고 공후인을 지어서 공후를 탔다(藿里子高 妻 麗玉 楊花渡 見人沒 作 引 彈 公無渡河曲云)는 구절이 있다.
선유봉이 선유도로 변하다.
일제강점기인 1925년 을축년 대홍수가 일어나자, 한강 범람을 방지하는 제방을 쌓기 위해 봉우리를 잘라 암석을 채취했다. 이는 선유봉이 선유도로 변한 시초의 일이었습니다.
1929년에는 여의도 비행장을 포장하기 위한 건설용 자갈과 모래를 퍼다 나르면서 섬이 깎여나갔다. 이후로도 계속된 한강 일대의 개발 사업 진행으로 섬이 낮아지면서 원래의 모습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후 1978년부터 2000년까지 서울 서남부 지역에 수돗물을 공급하는 정수장으로 사용되다가 2000년 12월 폐쇄된 뒤 서울특별시에서 164억 원을 들여 2002년 환경생태공원으로 개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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