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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얼(庶孼) .......세계일보, 강호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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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얼(庶孼)은 한 서린 말이다. 양인 첩의 소생은 ‘서’, 천인 첩의 소생을 ‘얼’이라고 했다. 서자(庶子), 얼자(孼子), 첩자(妾子)로도 불린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한 홍길동. 그 이름에는 천대받는 서얼의 한과 분노가 녹아 있다. ‘홍길동전’을 쓴 허균은 서얼이 아니었다. 동인의 우두머리 허엽의 아들로, 과거에 장원급제한 당대의 수재였다. 하지만 그의 스승인 당시(唐詩)의 대가 이달이 서얼이었으며, 광해군 때의 역모 사건인 칠서지옥(七庶之獄·1613년)의 주모자인 일곱 명의 서얼이 그와 가까웠다고 한다.

서얼이 품은 한의 역사는 조선 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 개국공신 정도전이 바로 서얼이다. 이방원은 반대편에 선 그를 몹시 미워했다. 정도전을 죽인 후 왕위에 오른 이방원은 재위 14년 되던 해 ‘서얼에게는 현직(顯職)을 금한다’고 못박았다. 성종 때에는 서얼 자손은 대대손손 벼슬을 할 수 없도록 한 규정이 만들어진다. ‘서얼금고’ 조치다. ‘부자유친(父子有親)’을 밤낮으로 입에 달고 살던 조선의 유학자들이 유교적 가부장제도 아래 만들어낸 것이 가족을 파멸로 몰고간 서얼 차별이다.

억눌리고 탄압받은 서얼들. 그들 가슴에 개혁의 싹이 자라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 모른다. 사변을 거부하고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외친 조선의 실학자 중에는 유난히 서얼 출신이 많다.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는 모두 서얼이다. 이들 이름이 역사에 남은 것은 명군 정조가 서얼을 발탁해 규장각에서 일하도록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전에도 깨인 지도자는 있었다. 율곡 이이와 서애 유성룡. 이이는 서얼 등용을 주창하고, 유성룡은 임진왜란 와중에 서얼은 물론 천민까지 공을 세우면 관직에 오르도록 했다.

“내 어머니는 평생 ‘작은 댁’으로 사셨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자서전에 남긴 말이다. 다하지 못한 말이 더 있는지 모르겠지만 서얼이라는 말로 받아들여진다. 서얼을 천시하는 눈을 걱정했기 때문일까. 모진 정치 역정을 걷는 동안 그는 어머니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가 이 말을 남긴 것은 큰 댁이든 작은 댁이든 어머니는 결코 부끄러워할 수 없는 ‘더없이 귀한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게다. 그래서 더 빛난다. 사선(死線)을 넘나든 그의 투쟁은 ‘작은 댁’의 아들이었기에 가능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강호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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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3

이태곤님의 댓글

언젠가 말씀중에 알에서 깨어난 박혁거세도 서자의 자식이었고, 문씨 시조도 서자 출신이라고 하신듯.
사랑하는 남녀의 뜨거운 합궁에서 귀한 자손이 잉태되는데, 그 공식에 서자가 많다고..... 그러고보니 주몽이 주인공인 드라마에서도 그는 서자와 흡사한 출신이었군요?

박순철님의 댓글

서자나 얼자는 그 자신이 선택한 운명은 아니다.
그러나 그 업보는 자신이 져야 하며, 너무나 무거운 짐이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하지 못하는 한은 그냥 소설 속에 있는 한 구절이 아니라
피맺히고 한서린 절규인 것이다.

그래서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 자서전을 통하여 밝히신 내용은 감동 그 자체이다.
“내 어머니는 평생 ‘작은 댁’으로 사셨다.”

내가 생각할 때 사선(死線)을 넘나든 그의 투쟁은
‘작은 댁’의 아들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라기보다
어머니를 부끄러워 하지않고 당당히 자서전을 통하여 밝힐 수 있는 의연함이
소중한 힘의 근원이라고 본다.

만일 어머니를 부끄러워 했다면 끝까지 감추었을 것이고
저세상에 가서 어머니 앞에서 통곡을 할 일이다.

그러나 이제 담담히 밝히는 그 마음이 저변에 깔려서
오늘의 김대중대통령을 탄생시켰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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