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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학생 사업과 하계40일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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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학생 사업과 하계40일전도


 고학생 사업으로 교회 쌀독을 채우다


지금처럼 집에서 정기적으로 용돈을 매달주지는 않았지만 가끔 생기는 용돈으로 탁구장에도 다니고, 친구들과 빵집에도  어울러 다니는 것이 내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그 때 그 시절 학창시절의 낭만이요, 추억이었다.


 그러나 나는 교회 형편이 너무 어려운 것을 알기 때문에 단돈 10원이라도 용돈이 생기면 그것으로 분필이나 교회에 필요한 물건을 사거나 헌금을 하였음으로 학창시절동안 그 흔한 탁구장이나 빵집을 한번 다녀보지 못하였다. 물론 돈도 없었지만 매일 교회에 가서 원리강의를 듣고 늦게 귀가하다 보니 시간도 없었고, 마음의 여유는 더더욱 있을 수가 없었다.


 지금은 그 때 처럼 가난한 학생들이 많지도 않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은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는 여건이 좋아서 아르바이트로 학비도 벌고 용돈도 벌고 있다. 그러나 내가 학교를 다니던 1960年代에는 연필이나 비누를 팔아서 스스로 학비를  벌어서 공부하는 고학생이 있었다.


 교회 쌀독이 빈 것이 확인되면 가끔 학교에서 조퇴를 한 후 책은 교회에 두고 연필과 비누를 사서 빈 가방에 넣고 단위로 가는 버스를 타고 시골 마을로 가서 연필과 비누를 파는 고학생 사업을 하였다.


 처음에는 잘 사줄 것 같은 첫 집을 골라서 들어갈까 말까 몇 번이고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어 들어갔지만 부끄럽고 가슴이 떨려서 “연필을 사 달라”는 말이 나오지 않아서 도로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고를 몇 번을 반복하였다.


 특히 숙기가 없는 내성적인 나로서는 연필 장사하는 것이 너무 너무 어렵고 힘들었다. 차라리 육체적인 노동을 하는 것이 더 마음이 편할 것 같았고, 당장 그만 두고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래도 교회를 위해서 그 일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렵게 한번 성공을 한 후에는 부끄러움도 조금씩 사라지고 용기가 다시 생겨서 말이 제대로 나오고 성공(판매)하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말하는 요령도 조금씩 늘어나게 되고 점점 익숙해졌다.


 사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가방 속에 연필과 바꾼 쌀을 가득 담고 해가 지는 시골 들판 길을 지친 몸으로 무거운 다리를 이끌고 걸어오면서 성가 13장 ‘맹세’ 2절

“철없이 따라 나선 몸 발자취 따라 가는 몸이

 지쳐서 쓰러 지며는 날 돌아보고 부르시네

 멀고 먼 저 가시밭길 피로 물들인 험한 그길

 나는 맹세코 가오리다 아버님 가시는 그곳까지“

을 부르면 어느새 두 볼엔 뜨거운 눈물이 주르르 흘려 내렸다.


 이러한 생활이 몇 번이고 반복되다 보니 두려운 것은 혹시 아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었다. 아는 사람을 만나서 그 사람을 통하여 부모님에게 알려지면 어떻게 하나 걱정을 하면서 한집 한집을 들어갈 때 마다 늘 가슴 조리고 긴장이 되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한번은 자전거를 타고 이웃 마을을 다니면서 장사를 하는 우리 동네에 사는 형님의 친구 분을 만나게 되었다. 그 순간 너무 놀라서 정말 온 몸이 굳어지고 다리가 떨려서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날 이후로 우리 동네에는 내가 연필을 팔고 다니는 고학생 노릇을 하고 다닌다는  소문이 나게 되었고, 부모님에게 이 사실이 알려져서 심한 야단을 맞게 되었다. 부모님께서는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공부하라고 학교에 보냈는데 공부는 하지 않고 연필장사를 하고 다닌다고 하니 동네 사람들에게 창피하기도 하고 도저히 나를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었다.


 그동안에도 많이 참고 철이 들기를 기다렸지만 이제는 더 이상 학교에 보내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등록금을 주시지 않아서 나는 한 동안 등교정지를 당한 상태로 학교에 다니기도 하여 결석일수가 다른 학생들보다도 많게 되었다.


 선배들이 피를 팔아서 헌금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하루는피를 팔기 위해서 토요일 날 부산에 있는 병원을 찾아가서 피를 팔겠다고 요청하였으나 어린 학생에게는 채혈을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어려운 사정이 있어 꼭 피를 팔아야 된다고 애원을 하였지만 않된다고 하여 하는 수 없이 무거운 발걸음으로 교회로 다시 돌아온 일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 때 피를 팔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학생신분으로 하계40일 전도 참여


  김한수 지역장님께서는 언제나 정통적인 신앙을 강조하시고 교육하였기 때문에 여름 방학이 되면 어린 학생이었지만 하계 40일 전도에도 참여를 하게 되었다. 1964년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40일 하계전도에 참여했을 때는 가뭄으로 논의 벼가 타들어가 농부의 마음이 바삭 바삭 타들어갈 정도로 전국적으로 가뭄이 심하여 양식을 아끼기 위하여 보리죽을 쑤어먹을 정도로 심각한 해였다.


 지금처럼 물 관리가 잘 될 수 있는 수리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한 포기의 벼라도 가뭄에서 살리기 위하여 모든 식구들이 매달려 논에 물을 퍼야했다. 정말 고양이 손이라도 필요한 때였다.  이러한 때에 내가 40일 동안 집을 나가서 없어졌으니 부모님으로써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40일 하계전도를 마치고 집에 와 보니 부모님께서는  더 이상 학교에 보내지 않는다고 작정하시고 교과서 책을 없애 벼려서 방학이 끝난 후에는 교과서 없이 한동안 학교를 다닐 수밖에 없었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 방학 때부터는 매년 하계40일전도활동에 참여한다는 것이 학생으로써는 너무 힘들고 어려운 면도 있지만 부모님 반대가 워낙 심하기 때문에 계속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사업으로 40일 전도를 대체하기로 하고 매년 고학생 사업을 하여 교회에 헌금을 하였다.


 방학 때에는 도시락을 갖다드릴 수 없었기 때문에 사업이라도 해서 헌금을 하여야 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지역장님의 소개장이 있어야 이동하는 지역의 교회에서 잠을 잘 수 있었기 때문에 소개장을 미리 준비하고 밥값을 아끼기 위해서 미수가루도 준비하였다.


 김해에서 부산을 거쳐 동래, 청도, 경산, 대구까지 한 바귀 돌아오면 15일 정도 걸렸다. 평소에 고학생 사업을 하면서 경험을 얻어 익숙해 졌기 때문에 이번에는 큰 두려움 없이 자신감을 갖고 출발할 수 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한 여름 뜨거운 때약볕 아래에서  학생복을 입고 학생모를 쓰고 가방을 들고 가정 방문을 하면서 하루 종일 걸어 다니면서 연필 장사를 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등줄기에 땀이 흘려 내려서 웃옷은 땀에 젖어 등에 바짝 달라붙었고, 얼굴에도 계속 땀이 흘려 내렸다.  특히 대구는 여름에 기온이 높기로 유명한 곳이라서 너무 너무 더워 한 낮에는 숨이 막히는 느낌이었다.


 밥값을 아끼기 위해서 점심과 저녁은 가정 방문을 하면서 얻어먹었다. 사업을 마치고 저녁이 되면 가까운 교회를 방문하여 지역장님께서 써준 소개장을 보여드리고 사정을 말씀드려 교회에서 잠 자는 것을 허락을 받은 후 교회에서 땀에 젖은 옷을 손으로 세탁한 후 잠을 잤다.


 하루 종일 더운 날씨에 땀을 흐리며 걸어 다녔기 때문에 너무 너무 피곤하여 몸은 물먹은 솜처럼 천근만근 무거워서 내 몸이 납덩이가 되어 방바닥으로 꺼지는 느낌이 들었다. 발바닥은 물집이 잡히고 다리는 부어있었다. 그러나 아침에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다시 일어나 미리 준비한 미수가루를 물에 타서 아침 밥 대신 마시고 다시 다른 곳으로 출발하였다.


 이러한 생활이 보름 정도 반복되고 나면 얼굴은 까맣게 타고 몸은 여위어지고 피곤이 점점 쌓여갔다. 사업을 마치고 김해 교회에 돌아와서 성전에 엎드리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지고 통곡이 나왔다.


 그동안 사업한 것을 결산하여 지역장님께 드리고 집으로 돌아오니 집에서는 난리가 났다. 마르고 까맣게 탄 내 모습을 본 부모님께서는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처다 보기만 하시다가 아예 집에 들어오지 못하게 쫓아내어버렸다.


 여름에 일손이 많이 필요한 농사철에 또 집을 나가서 보름 후에 돌아왔는데 건강하던 자식이 마르고 까맣게 타서 다른 사람의 모습이 되어 들어왔으니 부모님의 마음이 어떻겠는가 하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출발할 때 부모님 허락 없이 몰래 집에서 나왔기 때문에 부모님 입장에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아무리 나를 이해하려고 하여도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정이 많으시고 마음이 약하신 어머니께서는 내가 딱해 보이시는지 아버지 몰래 나를 불러다가 밥을 먹이고 집에서 있게 해주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너무 부모님과 형제들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린 불효자가 된 것 같아서 너무 죄송하고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더욱이 부모님께 불효를 하면서도 뜻 앞에 일도 제대로 하지 못했으니 더욱 죄송하고 미안하다


 그 때는 철이 없어 뜻과 심정에 사무쳐서 부모님의 아픈 마음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없었는데, 이제 나도 자식을 낳아서 키워보고 손자도 키워보니 부모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 때의 부모님의 안타깝고 아픈 마음을 어찌 다 알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제 두 분 모두 돌아가시고 계시지 않으니 아픈 마음을 위로해  드릴 수도 없고, 보답을 해드리고 싶어도 해드릴 수가 없으니 특히 어버이 날을 맞이하면서 그저 죄송한 마음만 남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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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6

이봉배님의 댓글

학창 시절의 그 불타는 심정으로 뜻대한 충성심이 대단 하셨네요

김 한수 지역장님 참 대단 하셨지요 그 열정과 패기 --

최이덕 님의 학창 시절의 그 충성심 으로 일궈낸 아름답고 진기한 추억담에

눈시울 적시며 공감 하는바가 큽니다 저 먼곳ㅇ의 곳간에 차곡차곡 싸여진

님의 흔적을 그님은 잘 간수하여 내내 님의앞길에 증명서로 쓰실것을 확신 합니다.

고종우님의 댓글

세상사람 한 트럭을 싣고 와도 너 하나와 바꿀수 없다신던 아버님 말씀이 생각 납니다.

최이덕님의 글을 읽으려니 그 때 그 시절 꿈같은 세월이 흘러 갔는데

청순한 학생의 가슴속에 하늘대한 충절이 올곶은 신앙인으로 통일가의 산 역사를

이뤄온 주인공이 되셨음 입니다. 지금 어린 학생들이 상상 할수 없는 선배님들의

초창기 간증은 참 부모님을 증거하고 역사를 증거하는 자료가 될것입니다.

천복궁에서 이길연 교수님이 주일오후에 자서전쓰는 공부를 지도 하는데

생애 자서전 한번 내보시면 크게 은혜가 되실것 같습니다.

은혜로운 간증글 읽으며 이런 글들이 우리 홈에 많이 올려졌으면 바램입니다.

조항삼님의 댓글

존경하는 최이덕 전회장님 자랑스런 학창시절의 간증이 저의 가슴에는

눈물과 감동의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치는군요.

 

진실로 저는 회장님의 리얼한 빛바랜 추억이 뜻대한 충정심으로 오버랩되니

너무나도 자랑스러워 보입니다.

 

정말 가슴 뭉쿨한 천일국 다큐드라마로 영영세세토록 길이 빛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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