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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를 쓴 사마천의 기구한 운명,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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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oticon_23.gif [사마천과 궁형]

패장敗將 이릉李陵을 변호해 준 일 때문에 그가 궁형이라는 처형을 받은 사건이다.

궁형宮刑의 치욕 : 궁형이란 남근을 떼어 버리는 형벌로서 일명 부형腐刑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떼어 낸 자리의 상처에서 썩는 냄새가 나기 때문이기도 하고, 썩은 나무처럼 열매(자식)를 맺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요컨대 남자가 남자 아닌 존재로 되는 것이요, 더 심하게 말한다면 인간이 인간이 아닌 존재로 되는 가혹한 형벌이다. 형법상으로는 사형 바로 다음에 해당하는 형벌이지만, 그 굴욕의 치명성은 사형에 비할 바 아니다.

그 당시 이릉은 굴지의 명장이었다. 불과 5천의 병사를 이끌고 흉노 10만의 기병을 상대하여 그중 1만을 넘는 흉노의 군사를 살상했으나 무운도 없이 그만 흉노의 포로가 되었다.

이릉이 얼마나 눈부신 전과를 올렸는가는 누구나 다 뻔히 알 수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무제는 그 결과에 격분하여 이릉을 처벌하기 위한 조의朝議를 열었다. 그러자 신하들은 무제의 속셈을 알아차리고 이구동성으로 이릉의 잘못을 늘어놓았다. 그러자 사마천은 그의 양심과 정의감이 명령하는 그대로 이릉의 공적을 찬양하면서 임금에게 아첨만 하는 신하의 무리를 규탄했다. 그 결과 그는 사실을 왜곡하고 남을 비방했다는 죄목으로 투옥당하는 몸이 되었다.

이듬해, 이릉이 한을 칠 흉노의 군사들을 훈련시키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사실은 와전된 것이었으나―무제는 이릉 일가를 멸족시키고, 사마천에게도 사형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사마천은 죽어서는 안 될 까닭이 있었다. 절의 때문에 목숨을 잃게 되리라는 것은 이미 굳게 각오한 바였지만, 그에게는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역사의 저술을 완성해야 한다는 막중한 책무가 주어져 있었다.

그 당시 사형을 면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한 가지는 50만 전이라는 막대한 벌금을 내는 것이었고 또 하나의 방법은 스스로 궁형을 받겠다고 나서는 일이었다. 집안이 부유하지 못한 그로서는 벌금을 낼 수가 없었기 때문에 결국 사대부로서 가장 큰 굴욕인 궁형을 택함으로써 삶에 대한 치욕을 천하에 드러낸 것이었다. 그때가 기원전 98년이었으니, 사마천은 40세 전후의 장년이었다.

그동안의 참담하기 그지 없었던 그의 심정을 그는 뒷날 <임안에게 답하는 글>에다 남김없이 밝힌 바 있다.

<天道, 옳으냐 그르냐> 2년 후 대사령大赦令을 받고 출옥한 사마천은 中書令(궁정의 비서장관) 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것은 무제가 나이 듦에 따라 자연 궁 안에만 있게 되자 새로 설치한 직위였다. 중서령이란 정무를 보고하고 결재를 받는 재상에 해당하는 요직이었고, 더구나 궁정 안에 출입이 허용된 남자란 거세된 사람뿐이었으므로, 사마천에게 바로 그 직위가 돌아온 것이었다.

전날의 사형수였던 사마천이 이제 와서는 무제의 측근 중의 측근인 존재가 되어 그를 받드는 몸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생 체험은 사실 그에게 있어서는 절망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사마천은 옳은 것을 밝히고자 한 것 때문에 궁형에 처해졌고 삶의 치욕을 드러내야만 했으며, 또한 그것 때문에 오히려 권력의 중추에까지 몸을 담게 되었다. 이처럼 인간을 우롱하는 일이 또 어디 있을까.

이것이야말로 아이러니컬하다기엔 너무도 비참한 노릇이었다. ‘세속적인 것에 영합해서 부침부앙浮沈府仰하는 일 없는 무사주의로(<임안에게 답하는 글>에서)’ 임무를 다하면서 《史記》의 저술에 몰두하던 사마천의 뇌리에 비친 것은 모름지기 “天道, 그것이 과연 옳으냐 그르냐”라고 하는 뼈아픈 의문이었던 것임에 틀림없다. 그는 스스로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을 하려고 얼마 남지 않은 생애에 저술을 서둘러 마침내 기원전 91년에 이 대저서를 완성했다. 그가 죽은 것은 그로부터 수년 후의 일로 추측되고 있다.

[蛇足]

2013년! (어떤 형태로든) 천일국의 완성도를 그리기 전에는 '죽을 수도 죽어서도 안되는' 기구한? 운명의 우리들이 아닐까를 생각해 봅니다.

아니면, 그런 거창하고 원대한 삶의 목표는 아니더라도,

최근 우리들이 당면한 아주... 아주 조그마한 ...그러나 언젠가는

'그래, 별로 중요할것 같지는 아니해도 하도 설쳐 대기에 못이기는 척 따라하기는 했더니만,

의미있는 일 하나 하기는 했지..' 라고 말할 수 있는 거 생각나지 않나요?

분명 1800축복가정의 <史記>가 됨직한 거시기 수록 운동에 대하여 유념해 보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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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5

박구용님의 댓글

성화14회 선배님 이시라고 하니까. 친 형님같은 심정입니다.
저는 7남매 장남이라 동생들은 많아도 형님이 없는데, 친 형님처럼 형님께 세상살이 배우며 살겠읍니다. 1800가정 앨범으로는 형님 얼굴 기억 하겠는데요. 많은 인연이 없었던것같았어요.모임때 만나뵙고 형님께 만이 배우겠읍니다. 1800가정에 좋은 형님들 많은데요.드러내시지 않으시니까 어떤 형님들이 글을 잘쓰는 형님들 인지 잘 모르겠어요. 오손도손 홈페이지를 너무 늦게 알았어요. 바쁘다는 핑계로요. 정해관형님 ! 요즘 무척덥드니 오늘은 좀시원 합니다.
정해관 형님 화이팅 ! 소요산이 있는동네 경기도 동두천에서 1800가정 16회 동생 구용 올림

정해관님의 댓글

성16회가 '인재의 보고'임을 짐작은 했으나 또 형과 같은 인물이 있음을 든든하게 생각합니다(본인은 14회) 논문의 제목만 보아도 우리 통일가에 시의적절하며 실용적인 연구성과가 됨직합니다. 빨리 뜻하신 바대로 이루어 지기를 기원합니다. 저역시 큰 원군을 얻은 느낌입니다. 이곳에 3개월여 지났는데, 도무지 '침묵하는 다수' 뿐인듯 하여 감을 잡을 수 없어요...

박구용님의 댓글

박구용: 정해관님의글 정말 깊이있고 감명깊게 읽었읍니다. 1800가정의 역사책은 꼭. 빠른 시일내에 나와야 된다고 저도 생각 합니다. 저는요즘 "천일국생활 프로그램 진단에관한 연구"논문을 쓰고 있읍니다. 완성되면 박사학위 통과되면 꼭한권 선물 하겠읍니다. 정해관님 행복하세요. 2007. 7. 11. ( 참고: 성화16회 충북 옥천 출신 종교신문18년근무)
현, 영등포교회전도부장 박구용 올림

문정현님의 댓글

극한 상황에 반전 드라마를 보는 기분입니다.
우리의 삶에 가장 귀하게 가치를 부여할게 무얼까?
.
.
큰것을 잃고 새로운 하나를 부여받음도
본전에 속하는 걸까요?
.
.
이래저래 숙명과 운명까지 사랑하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동승합니다.

kmryel님의 댓글

훈장님 몰랐던거 또 하나 알았네요. 그런데 이메일 보내온자 하나도 없어서...... 우선 정보공개를 원하는 가정만 하여야 될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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