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천로역정--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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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 생애-3
(1950. 6.25 두달 후 폭격때) 당시 흥남 감옥에는 철근콘크리트로 된 방공호가 파져 있었다. 그 안에 몇천명이 들어갈 수 있었는데 사회에서 노무자로 와서 일하던 사람들이 먼저 거기에 다 들어가고 우리 1,500명은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가마니를 쌓아둔 곳 밑에 숨었다. 그 숨은 모양이 꿩을 잡으려고 하면 꿩이 달아나다 갈 곳이 없을 때 꽁지는 뒤로 들고 머리만 쳐박고 숨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숨었다. 시간이 얼마 지난후에 정신을 차리고 살펴 보았다. 내 위에 뭐가 있어 치우고 내려다 보았더니 앞에는 파편을 머리에 맞아 피가 낭자한 사람, 옆에는 등에 파편이 꽂혀서 죽어있고, 어떤 사람은 다리가 부러져서 내려오지 못하고 ‘아이구 아이구’하는 사람도 있고, 창고 지붕이 날아가고 허연 하늘이 되어 있었다. 집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었다. 내 짐작에 세시간 동안 B29가 폭격한 것 같았다. 철근 방공호가 직격탄을 맞아 우물처럼 되고 말았다. 그 안에 있던 사회사람 노무자들은 몽땅 죽었다. 일어나 가지고 사방을 보니 죽은 사람 천지였던 것이다.
그때서야 내가 “누구든지 살려면 내 뒤를 따르라”라고 소리지르면서 건물 안으로 달렸다. 그러자 다들 내 뒤를 따라 오는데 간수도 따라 쫒아 왔다. 들어오면서 생각난게 뭔가하면 ‘우리가 앞으로 큰 뜻을 이루려고 하는데 이 폭격에 선생님이 맞아 세상을 떠나시면 어떻게 하나’ 라는 생각부터 먼저 떠 올랐다. 그래서 마당을 둘러 보았다. 선생님께서 어디 계신지만 찾았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마당 한 복판에 앉아서 태연자약하고 계셨다.
그래서 그때 또 한번 놀라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혼이 나가지고 반 죽은 사람이 되어 있는데, 아무렇지 않게 앉아 계시는 모습을 보고 내가 선생님 앞에 무릎꿇고 팍 엎드렸다.
“선생님! 선생님 여기 살아 계셔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라고 했더니 태연자약한 자세로 폭격당한 사람 같지 않게 땅에 머리를 박고 있는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면서
“전쟁 속에 폭격을 해도 나는 상관이 없으니 내가 앉은 자리에서 12m 둘레에 있으면 파편 하나도 들어오지 않기로 하나님께서 약속을 하셨다. 나는 그 시간에 영계의 영인들 하고 대화 했다.”라고 하셨다.
선생님은 영계의 영인들이 자기들이 이루지 못한 모든 일을 땅에 있는 선생님을 통해 이루어야 되기 때문에 선생님에게 와서 의논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폭격하는 것을 듣지도 못했다고 하셨다. 그 말씀을 들으면서 ‘과연 선생님이시구나!’ 라고 생각했다. 거기서 또 한번 감복했던 것이다.
출처 <史報> 제157호(1999년) P87. 박정화의 <스승 문선명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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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관님의 댓글
정해관님의 댓글
감시원들은 그들의 주의를 선생님에게 집중시켜 선생님을 고발할 조건을 찾고 잇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선생님의 방에 스파이를 놓아 두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말 한마디 하지 않았습니다.
감시원들이 한 죄수에게 밥을 조금더 주어서 그 죄수를 앞잡이로 이용하는 것은 매우 쉬웠습니다. 공산주의 세계에서 그들은 밥으로 사람을 조정합니다.
그래서 1등 노동자가 돼야 햇던 거예요. 살아남는 방법은 그것 밖에 없었습니다.
--아버님 말씀. 출처 위사보 33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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