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천로역정--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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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 생애-4
선생님에게 처음으로 ‘목사님’이라고 칭호를 한 사람은 우리 누님이었다.(평양 대동강 건너 남곡면 효남리에 7세 위인 누님댁이 있었음) 누님은 선생님에게 “목사님, 내 하나 밖에 없는 동생인데 잘 부탁 합니다. 내 동생 잘 봐주세요.”라고 했다. 선생님께서는 “아 염려 마시오.”라고 대답하셨다.
그런 인사를 하고 그날부터 남하를 시작했는데 그 날이 1950년 12월 4일 이었다. 거기서부터 자전거를 타고 밀면서 오는데 제물포 쪽에서 비행기 폭격소리, 곡사포 쏘는 소리가 났다. 날은 흐렸다. 수 많은 피난 인파와 함께 내려오는데 생지옥이었다. 한 사흘 동안은 길거리에서 줄곧 걸었다. 저녁이 되면 큰 집에 찾아 들어갔는데 대개 사람은 없었다. 집을 비우고 피난을 간 것인데 먹을 것은 모든 게 그대로 있었다. 이부자리, 쌀독에 쌀, 장독, 김칫독 그대로 다 있었다.
그리고 또 한 3~4일 갔다. 흑교와 황주 사이에 이르렀다. 길은 가파르고 피난 행렬은 끝이 없었다. 나는 자전거에 타고 있었고 원필씨는 뒤에서 밀고 있었다. 그런데 가파른 길이라 자전거가 자꾸 미끄러져 내려 왔다. 길을 올라가다 미끄러져 제자리로 내려오고 하기를 몇 번 하였다. 나를 이렇게 하면서 까지 데리고 가려고 하다가는 세 사람 모두 못갈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거기 주저앉아 선생님께 “내 운명은 여기서 처리 하겠습니다. 우리 셋이 함께 가다가는 다 못갈 것 같으니 원필씨 데리고 선생님 빨리 떠나세요.”라고 했더니,
선생님은 나를 책망하시면서 “원필이 너 이 자전거 끌고 가!”라고 하시고는 등을 내밀며 업히라고 하셨다. 나는 차마 업힐 수가 없었다. 그래서 주저주저 하니까 “뭘 해? 업히라는데!”라고 하셨다. 엉겹결에 업히게 되었고 고개를 넘어오게 되었다. 그리고 잔디밭에 앉아 한숨 돌리면서 선생님은 책망을 하셨다. ‘앞으로 이보다 몇 배 힘든 일이 닥칠지 모르는데 이것을 힘들다고 포기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또 ‘우리 세 사람이 가는 길에는 하늘이 보호하기 때문에 우리는 죽지 않는다’고 하셨다. 앞으로는 강한 마음을 먹으라면서 어떠한 고난이 닥치더라도 우리는 서울 까지 갈 것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약한 마음 가지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다.
출처 <史報> 제157호(1999년) P90--91. 박정화의 <스승 문선명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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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관님의 댓글
그러자 선생님은 "세현씬 저 차 타고 가세요. 우린 어떻게라도 갈 수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하고 달래어 보냈다. --위 사보 P89--
# 대충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참아버님께서는 전쟁이 한창 진행중인 그 시절, 그리하여 언제 어떻게 생사를 거는 위험이 닥칠지 모르는 위급한 상황에서 흥남 감옥을 출발--평양으로--평양에서 서울로--서울에서 경주거쳐 울산까지 도보로--그리고 울산에서 (기차타고) 부산까지의 고난의 행군을 감행하셨다.
알고보니 당신께서 원하시기만 하면, 위험천만한 도보로의 고난행군이 아니고 특별대우를 받으실수 있었는데도 사양하시고 불편한 몸의 제자를 대동하시고, 그 같은 고난의 노정을 걸으신 것이다. 민족과 인류 구원을 위한 탕감조건 수행에 필요한 과정이 아니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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