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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천로역정-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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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 생애-5

“그럼 우리도 용매도로 가자. 용매도는 나의 학창시절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를 찾아가면 도움을 받아 인천으로 갈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부랴부랴 준비를 하고 출발했는데 나는 자전거에 타고 원필씨와 선생님은 교대로 밀면서 갔다. 갯바닥에 들어서니 마침 그때는 간조라 물이 빠져 있었다. 길이 나 있었는데 땅이 단단했다. 그래서 자전거를 타고서 계속 갔는데 그 다음날 새벽에 천신만고 끝에 용매도에 도착했다.

그리고 선생님께서는 친구집을 찾아가셨고, 원필씨와 나는 좁쌀이면 좁쌀 입쌀이면 입쌀을 구해 바닷가에서 밥을 해 놓고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원필씨가 주먹밥을 해 놓고 있는데 선생님이 오셔서 “친구는 먼저 서울 가고 아무도 없다.”라고 하셨다. 우리는 궁리 끝에 ‘바다에 배가 있으니 우리가 밥을 먹고 얼른 가서 타고 있자. 만조가 되면 배가 떠날 것이다’라며 서둘렀다. 그래서 우리는 소금을 발라 밥 한줌씩을 먹고 무조건 배에 올라 탔다.

하루가 지나자 새벽녘에야 배가 둥둥 뜨는 것 같았다. ‘이제는 가려나?’하고 있는데, 경찰과 헌병 두명씩 올라 왔다. 그리고 “이 가운데 군인과 경찰 가족 아닌 사람은 전부 내리시오.”라고 했다. 그래서 거기서 내리게 되었다. 그리고 왔던 길을 되돌아 청단까지 가게 되었다.

청단에 오니 불량배, 보안대란 아이들이 우리 길을 가로 막고 나는 다리가 아프니까 놔두고 원필씨와 선생님을 데리고 갔다. 한 시간 쯤 후에 원필씨가 훌쩍훌쩍 울며 왔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못된 놈의 새끼들 한테 선생님이 구타를 당하셨어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분한 생각이 들었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뒤따라 오던 선생님은 “쓸데 없는 소리 마라. 이건 다 약과야.”라고 하셨다. 이런 일을 몇 번 겪으며 내려 왔다.

하루는 선생님께서 “하룻길을 더 가면 우리를 대접하려고 준비하는 곳이 있어. 그러니까 희망을 가지고 가자.”고 하셨다. 우리 둘은 무슨 말씀인지 몰라 그냥 오는데, 한 이틀 쯤 지나 어느 저수지 옆에 오니까 저년시간이 되었다. 그 곳에 집이 하나 있었는데 불이 반짝반짝 했다. 그래서 “피난민입니다. 하루 쉬어 가십시다.”라고 했더니 문을 활짝 열면서 어서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들어가 보니 잔치집에서 손님을 맞으려고 만들어 놓은 것 같은 상을 차려놓고 있었다. 그래서 선생님께서 물어봤다.

“당신들은 어떻게 우리가 올 줄 알았습니까?‘ 하니까 그 사람 부부는 자기들이 장로교 집사인데, 둘 다 며칠 전에 꿈을 꾸었다고 했다. 며칠 뒤에 훌륭한 분이 이곳을 지나갈 텐데 잘 대접하라는 꿈이었다는 것이다. 그날이 오늘 이었고 하루 종일 기다렸다는 것이다.

비싼 재료로 만든 음식은 아니었고 시래기국에 쌀밥 정도 였지만 정성을 들여 잘 차린 음식이라 맛있게 먹고 하루를 지냈다.

그 뒤 장단이라는 곳에 이르렀다. 모두들 곤히 자고 잇는데, 새벽에 선생님이 “정화야, 빨리 일어나! 빨리 원필이 깨워!” 하신다. 나는 눈을 비비면서 “아이고 뭐 급하지도 않는데 오늘 하루 밤 더 여기서 쉬고 가시지요,”라고 했다. 그러자 선생님은 “무슨 소리야. 빨리 일어나야 돼. 오늘 밤에 임진강 건너지 못하면 영 건너지 못해. 빨리 가자.”고 하셔서 임진강 까지 가게 되었다. 그 때가 밤 11시 쯤 되었다. 12월 그믐 쯤이었는데 임진강이 얼어 있었다.

얼음이 꽁꽁 언것이 아니라 약하게 얼어 있었다. 사람이 지나가면 내려 앉은것 처럼 됐다가 지나가고 나면 얼음이 다시 올라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빨리빨리 지나가야 했다. 원필씨가 자전거를 끌었고 나는 지팡이를 짚으며 용케 건너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렇게 임진강을 건너온후 선생님과 원필씨는 두 시간 정도 유엔군이 철조망 치는 작업을 도와주고 오셨다) 그 이후에는 사람들이 넘어오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후기) 경주 가기 전 건천 지나 사인이라는 곳 까지 왔다. 그런데 느닷없이 선생님이 나에게 “너 이제 지팡이를 버리고 혼자서 걸어라.”라고 하셨다. 나는 아직 다리가 온전치 않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말씀을 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기브스를 풀고 일어서 보았다. 비틀거리며 움직여보니까 완전히 나아 있었다. 그래서 그 때 부터는 업히지 않았다. 그 때부터 자전거는 내가 끌면서 선생님과 원필씨를 따라 갔다.(경주까지) 나는 경주에 남아 있게 되었고 선생님과 원필씨는 걸어서 울산까지, 울산에서 기차로 부산 초량역에 도착했다고 들었다.

그 후 1953.5월 부산 수정동 교회에서 선생님과 다시 상봉했다.

출처 <史報> 제157호(1999년) P92--93. 박정화의 <스승 문선명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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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

정해관님의 댓글

김원필 선생님의 당시 상황 간증
배는 고프고 추워서 할 수 없이 조밥을 만들어 먹었다. 이 추운데 바다를 다시 건너가야 할 생각을 하니까 박정화씨나 나는 마음이 약해졌다. 그러니까 선생님이 그 눈치를 채시고 우리에게 “오늘 우리들을 대접해 줄 좋은 귀인을 만날거다”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에 아주 기운이 났다. 그래서 또 그 바닷길을 건너왔다. 그 때는 해가 다 떨어지고 추운데 그 동네를 지키는 동네 사람들이 선생님이 머리가 짧으니까 인민군 패잔병이 아닌가 하고 선생님을 구타했다. 남한의 군인들은 머리를 길렀지만 인민군들은 머리를 짧게 잘랐다. 그래서 선생님을 오해했던 것이다. 그러자 선생님이 짐 속에 있는 성경을 보여 주시면서 목사인데 형무소에서 나와서 머리가 깍인 것이라고 했더니 그 사람들이 성경을 펴가지고 성경 절수를 대면서 거기에 무슨 내용이 있느냐고 선생님께 물었다. 그것은 선생님이 진짜 목사인지를 알기 위해서였다. 선생님께서 성경구절을 보지 않고 다 말씀했다. 그래서 돌려보내 주어서 돌아오는데 길가에 불빛이 있어서 그 불빛을 찾아서 문을 두드렸더니 거기에 젊은 부부가 우리를 맞아서 좋은 방에 음식을 주어서 잘 먹고 잘 잤다.

다음 날 내가 생각하기를 ‘어저께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맞았구나’하는 것을 그 때에야 깨달았다. 그리고 어제 그런 약한 마음을 가지는 대신 도리어 선생님께 ‘힘들지 않으십니까?’ 하고 위로는 못하나마 약한 마음을 보였으므로 선생님은 우리에게 오늘 좋은 분을 만나리라고 말씀을 하시게 됐고, 그 좋은 사람을 만나기는 만났지만, 선생님께서 그 동네사람들에게 매를 맞으신 것을 생각하니 우리가 맞아야 될 매를 선생님이 맞으셨지나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것을 볼 때 모든 은혜라는 것은 당신이 그 어려움을 당한 대가로서 우리에게 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종영님의 댓글

수도를 위하여 세상만사 다 버리고 도를 닦기위하여 천리행군을 하셨던 도반님들 그들이 있었기에 통일교의 전통을 세우고 역사의 창건을 이루었으니 사리가 나올때까지 계속 수도를 하셔야 할터인데...한번 속세로 내려와 속인과 어울리어 그 혼의 결실체 중도에 머물고 말면 만들어 놓은 사리함은 어쩌란 말인고.공즉시색 색즉시공 사리자 옴 도로도로 사바하....옴 도로도로 옴 도로도로 사바하

조항삼님의 댓글

참으로 상상하기 힘든 고난과 역경이었슴을 절감합니다.
당시의 상황전개가 우리에게는 감동적입니다.
귀한 자료 잘 보았습니다.

정해관님의 댓글

지금은 지난 얘기니까 '아, 그런 때도 있었네요.'하며 지나칠 수도 있겠지만, 말 그대로 '파란만장'의 고난의 여정은 '눈물없이는 감상 할 수 없는 최고 비극의 드라마'임에 틀림없습니다.
전쟁의 상황에서는 예측이 불가능한 '무법천지' 여서 증인(박정화 선생)이 다리를 크게 다쳐 3인의 고난을 가중시킨것도 전시하의 임의단체(주로 불량배 등이 주도하는 보안대. 자위대)였고, 위에서 처럼 [청단]이란 곳의 보안대도 '자기들이 하는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고 행한' 어둠의 자식들의 철부지 행위가 원필선생님과 우리들의 눈물샘을 크게 자극하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희망으로 가득차고 또 당연히 기대해야 할 시기에, 뜻하지 않는 경천동지의 사건으로 잠시나마 '의미있는 기적의 과거' 한토막을 되새겨 보는 기회가 아닌가 생각하면서, 눈길을 주신 분들께 감사드리며, 여기서 마감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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