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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의 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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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의 어원]

[벽창호] ‘碧昌牛(벽창우)’, 즉 평안북도의 ‘벽동(碧潼)과 창성(昌城)에서 나는 소’ 라는 뜻이다. 이 두 지역에서 나는 소의 특성에서 나온 말인데, ‘벽창호’로 형태가 바꾸어 “고집이 세고 무뚝뚝한 사람”이라는 의미를 띤다.

[하룻강아지] ‘하릅강아지’가 변한 것이다. ‘하릅’은 소. 말. 개 등과 같은 짐승의 ‘한 살’을 지시하는 단어이므로 ‘하룻강아지’는 한 살 된 강아지를 말한다.(하루된 강아지는 눈도 뜨고 있지 않아 고양인지 호랑인지 구분도 못한다)

[이판사판] ‘理判’(이판기 대감 아니고)은 속세와의 인연을 끊고 도를 닦는 일을 말하며(이판승), ‘事判’은 절의 재물과 사무를 맡아 처리하는 일을 말한다.(사판승) 그런데 ‘이판사판’은 본래 뜻과는 전혀 다른 ‘막다른데 이르러 어찌할 수 없는 지경’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이에 대하여 그럴듯한 몇 개의 근거 주장이 있다.(함부로 속단할 일이 아니다)

1) 조선시대에 스님이 아주 낮은 신분(숭유억불정책)이어서 이판승이든 사판승이든 스님이 되는 것은 인생의 끝이기 때문에 ‘이판사판’에 ‘마지막 궁지’ 또는 ‘끝장’이라는 의미가 붙었다는 설.

2) 스님의 길은 ‘이판 아니면 사판’으로 선택의 여지가 없는 길이기에 그러한 극단적 의미가 부여된 것으로 보인다는 견해.

3) 이판승과 사판승이 갈등, 대립한 시절이 있었다는 점에서 ‘이판’과 ‘사판’을 이용한 극단적 의미표현이 가능했다고 보는 것이다.

4) 이판과 사판의 특성을 고려해서 해석해 보는 견해 ; 속세와 인연을 끊고 용맹정진하는 ‘이판’의 비장한 행위와 부패의 나락으로 떨어진 ‘사판’의 파렴치한 행위는 모두 ‘이판사판’의 ‘극단성’ 내지 ‘무모성’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안성맞춤] ‘安城에서 맞춘 유기’라는 뜻이다. 품질이 아주 훌륭했기 때문에 “품질이 좋은 유기”라는 의미를 띠게 되었고, 여기서 ‘유기’를 생략한 것이 ‘안성맞춤’이다.

[독도] 역사적으로 ‘삼봉도(三峰島)’, 가지도(可支島), ‘석도(石島), ’독도(獨島)‘ 등으로 불렸다. 현지 주민들은 ’독섬(돌섬)‘이라고 부르는데, 이 ’독섬‘은 ’石‘을 뜻하는 ’독‘과 ’島‘를 뜻하는 ’섬‘이 결합된 순수한 고유어이다. 한자어 ’獨島‘는 ’독섬‘을 한자화하는 과정에서 ’독‘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자 그저 음이 같은 ’獨‘을 이용하여 만든 (음차자)로서 엉뚱한 명칭이다. ’독도‘는 ’외로운 섬‘이 아니고 ’돌로 된 섬‘일 뿐이다.

한편, 일본인들은 17세기 이후 ‘울릉도’를 ‘죽도(竹島,다케시마)’, 독도를 ‘송도(松島,마츠시마)라고 불러 왔다고 한다. 아마 울릉도에는 대나무가 많아서, 독도에는 소나무가 많아서 그러한 명칭을 부여한 것일 터인데, 지금의 울릉도에는 대나무가 많기에 그런 명칭이 제대로 어울리나, 독도에는 소나무는 커녕 어떤 나무도 없어 ’松島‘라는 명칭이 무색하다.

그러나 독도 여러 곳에서 나무 그루터기가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송도’라는 명칭이 아주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닐성 싶기도 하다.

그런데 19세기 말 이후 일본에서는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명칭에 아주 심한 혼란이 일어났다. 울릉도를 ‘竹島’ 또는 ‘松島’라고도 하고 독도를 ‘松島’ 또는 ‘리앙쿠르島’라고도 하다가, 1905년 이후에는 독도를 ‘竹島’로, 울릉도를 지금과 같이 ‘울릉도’로 부르게 되었다.

울릉도를 가리키던 ‘竹島’가 돌연 독도를 가리키게 되어 실제 독도에 대한 명칭은 사라지게 된 것이다. ‘독도’에 대한 자기네 이름(즉, ‘松島’)도 잃어버린 사람들이 그 땅이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니 역사적 사실은 들추지 않더라도 그들의 주장이 얼마나 억지인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우리도 ‘독섬’ 이전의 순수 우리말은 잃어버렸지만, 명맥이 유지되고 있는 ‘독섬’이라도 살려써야 한다. 이제 독도는 동해바다 끝에 애처롭게 달려있는 작은 섬이 아니라, 묵직한 돌로 자리를 튼 우직한 섬인 것이다. (참고문헌 : 심재기의 <언어와 의미>)

독도문제에 관해 대단한 전문가는 본부교회 부교회장으로 시무하시는 이인규 목사님이시다.

고견을 이곳에도 펼쳐주실 것을 기대해 본다.

관련자료

댓글 3

정해관님의 댓글

양성 이씨의 연원:
시조 이수광(李秀匡)은 송(宋)나라 사람으로 고려에 와서 문종조에 벼슬길에 올라 삼중대광보국(三重大匡輔國)에 이르렀고, 양성군(陽城君)에 봉해졌다.
‘갑자보(甲子譜)’ 세록(世錄)편을 보면, 그는 출중한 인품과 강유(剛柔) 겸전, 당(唐)나라의 곽자의(郭子儀)에 비견되었고 능란한 외교술(外交術)로 거란(契丹)과의 외교를 성공시켜 정난공신(定難功臣)으로 책훈되었다고 하였다.
또 송(宋)나라에 변란이 있어 고려에 구원을 청해 오자 왕명으로 원정, 한달 동안 세 차례나 승첩하는 공을 세워 송(宋)의 황제로부터 ‘고려대신(高麗大臣) 이수광(李秀匡)은 공관천하(功冠天下)이며, 명양후세(名揚後世)할 것’이라는 친서(親書)와 함께, 특진(特進), 금오위대장군(金吾衛大將軍), 상주국(上柱國)의 작위를 받았다.
양성(陽城)을 본관으로 삼게 된 것은, 난을 평정하여 공신으로 책훈되고 양성(陽城)을 식읍(食邑)으로 하사받은 데 연유한다.
그런데 ‘기해보(己亥譜)’ 부변의(附辨疑)편에는 고려말의 하빈(河濱) 이거(李琚)를 시조로 삼고 고려중엽의 양성(陽城) 이수광(李秀匡)을 그의 후손이라 주장하는 과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
즉 양성(陽城)을 본관으로 삼은 것은 이수광(李秀匡)으로부터 비롯되었고 그 분 이상의 선계(先系)가 어느 시대부터 있었는 지는 알 수 없어, 양성이씨(陽城李氏)는 모두 주국공(柱國公) 이수광(李秀匡)을 비조(鼻祖)로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양성이씨(陽城李氏)는 하빈이씨(河濱李氏)와 동관(同貫)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문의번영]
시조 이수광의 아들 이신정(李臣靖)은 이부상서에 오르고 손자 이원의(李元儀)는 승지, 증손 이영주(李英柱)는 상장군을 역임하였다. 이영주는 또 충렬왕의 딸을 아내로 맞아 왕실과 인척관계를 맺으며 더욱 튼튼하게 가문의 기반을 다졌다.
그의 아들 이천 또한 양성군에 봉해졌으며, 이천의 큰아들 이수방(李守邦)은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인품과 재능이 영종의 눈에 띄어 직성사인(直省舍人)의 벼슬과 나해(那海)라는 이름을 받았다고한다. 그의 네아들도 모두 벼슬을 해 사람들은 "나해같이 되었으면" 하는 뜻에서 "사나해(似那海)"라고 한것이 "사나이"란 말의 기원이 됐다고 후손들은 말한다.

조선시대 인물로는 세종때 유명한 천문학자이자 발명가인 이순지(李純之)가 있다. 그는 판중추원사에까지 올랐고 세종의 명을 받아 김담, 장영실 등과 함께 역법을 연구했고, 천문학 서적을 편찬하기도 했다. 그는 산학, 천문, 풍수 등 자연과학의 대가였는데 김담과 함께 쓴 "칠정산내외편" 이 그중에도 유명하다.
또 성종때 학자로 이름을 날린 이승소를 들 수 있다. 그는 다방면에 조예가 깊어 예문관제학을 지낼 때 명황계감(明皇誡鑑)을 우리말로 번역했고 문집 "삼탄집(三灘集)"을 남겼다. 그는 당시 문장으로 일컫던 서거정과 어깨를 나란히 한 문인이었는데 특히 용모와 태도가 단아청정해 금옥군자(金玉君子)라고도 불렸다.

현재 본부교회의 부교회장으로 시무하시는 이인규 목사님과 전주 '40계단의 높은 교회'에서 전북공화국을 책임맡고 계시는 이판기 목사님은 '종족메시아'로서 양성이씨가 낳은 큰 인물들 임에 틀림 없을 것이다.

정해관님의 댓글

핵교시절에 선상님들의 별명을 자신이 불러 달랜다고 그렇게 부르지는 아니하드시, 우공도사님이든 이판대감님 이든 남들이 부르기를 즐겨하면 그거이 자연스러운 존함이 아니라고라?...양성이씨 27세손님은 '실적달성'에 땀좀 흘리시고 계시는 모양이 90,000요...

이판기님의 댓글

지는예~ 이판승(理判僧)이 아니라예~~
吏判(이판)대감은 더욱 아니고라~~~
걍, 愚公일 뿐이라예~~
양성이씨 27世 인규 公의 고견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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