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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의 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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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의 길

후목/소상호

왜 이다지도

주위가 감득(感得)의 여백인지

카푸치노 한 잔으로

더듬어가는 삶속 양식이되고

영혼의 덧가지를 떼어내는 약이 되려나

연방 쥐어짜고 굽는

구수한 냄새

코를 간지르는데

이것이 진정

부드러운 커피의 길인가

커피를 마시는

우리의 길도 업어치고 뒤엎쳐

뒤웅스러운 모습으로

뒤척이며 일어 서야

부드러워 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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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6

정해관님의 댓글

황희의 생애
<고려조>
황희는 1363년(공민왕 12년)에 판강릉부사(判江陵府事) 황군서(黃君瑞)의 아들로 송경(松京 : 개성) 가조리(可助里)에서 태어났다. 열네 살 때인 1376년(우왕 2년)에 음직으로 복안궁(安福宮) 녹사가 되었고, 스물한 살에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곧이어 스물세 살 때 진사시에도 급제했다. 그러나 관직을 사양하고 오로지 학문에만 힘쓰다가, 1389년(창왕 원년) 스물일곱 살로 문과(文科)에 급제하였고, 이듬해 성균관 학관(成均館 學官)에 보직(補職)되었다.

<조선 개국기>
서른 살이 되던 해에 고려가 멸망하자 황희는 새 왕조 설립에 부정적인 다른 70여 명의 고려 유신과 함께 두문동에 들어가 외부와 일체 연락을 끊고 고려 왕조에 대한 지조를 지키려 하였다. 결국 이성계는 두문동을 포위하여 나오기를 요구하였고, 이에 따라 두문동에 들어간 고려 유신 중 나이가 가장 어렸던 황희가 관직에 나가게 되었다.

조선에 들어와서 세자 우정자(世子 右正字)를 겸무하고, 조금 후에 예문 춘추관(藝文 春秋館)을 맡았다가 사헌 감찰(司憲 監察)과 우습유(右拾遺)에 전직(轉職)되었는데, 이후에 경원 교수관(慶源 敎授官)으로 폄직(貶職)되었다. 그가 정치가로서의 수완을 발휘한 것은 47세에 지신사가 되던 때부터였다.

그는 태종의 극진한 예우를 받고, 그 뒤에 육조의 판서를 역임하는 동안 대사헌·지의정(知議政)·견명사(遣明使)·참찬·평안도 도순문사·한성판사(漢城判使) 등 내외의 주요 관직에 있으면서 문물(文物)과 제도의 정비에 노력하여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남겼다. 그와 함께 점차 왕의 신뢰를 쌓아갔는데, 그는 중추원을 없애 병제를 일원화하는 작업을 무리없이 추진하면서 태종 이방원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이후 태종은 모든 정사를 황희와 깊이 논의하였다.

<유배 생활>
그러나 이조판서로 재직하던 1413년(태종 13년) 세자 제(禔 : 양녕대군)의 폐립(廢立) 문제에 반대 의견을 내어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좌천(左遷)되었다가, 1418년(태종 18년)에 충녕대군이 세자로 책봉되자 이에 반대하다가 결국 폐서인되어, 교하(파주) 지방에 유배된다. 이 해에 태종은 세자에게 양위하고 물러나는데, 이때 교하가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남원으로 옮겨서 5년을 더 머물러야 했다.

황희는 남원에서 도교의 이치를 따라 《춘향전》의 무대가 되는 광한루를 만들었다.

<복직>
1422년(세종 4년) 태종은 그를 소환하여 직첩(職牒)을 주며 세종에게 부탁하여 곧 등용토록 하였다. 비로소 의정부 참찬에 등용되는데, 이때 황희의 나이는 60세였다. 세종은 황희가 자신이 세자에 책봉되는 것을 반대했고 외숙부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지만, 그의 사람됨이 바르다는 것을 알고 과감히 유배에서 불러들었다.

그 후 황희는 이조판서와 우의정에 임명되었고, 69세 되던 1431년(세종 13)에는 영의정의 자리에 올랐다. 이후 18년 동안 황희는 명재상으로서 세종을 잘 보필하여 태평성대로 이끌다가 1449년(세종 31) 87세로서 은퇴하였다.

그가 죽은 뒤 세종묘(世宗廟)에 배향(配享)되었다.

※ 뻐꾸기는 남의 둥지에 알을 낳는다. 뻐꾸기 새끼는 먼저 알에서 깨어나
그 둥지의 진짜 아들딸들이 깨어나기 전에 둥지 밖으로 밀어 떨어뜨려 죽이고
지가 그집 자식 노릇을 하며 띨빵한 아빠새 엄마새가 물어다 주는 먹이를 먹고 무럭무럭자란다.

아마도 눈치 높은 독자들은 김상헌과 황희에 관하여, 앞서의 유노숙님의 글에 대한 댓글(2곳)과 이곳을 통해 필자와 함께 ‘위대한 발견’을 하리라 생각 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병자호란시 주전파의 거두였던 김상헌은 삼학사 처럼 장렬하게! 죽어야 했고, 황희 역시 대쪽 같은 선비의 기개로 두문동에서 동료들과 함께 최후를 마쳐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살아서’ 죽음보다 훨씬 칭송받을 위대한 업적을 쌓아 역사에 남아 있다.
지금의 우리들도 어느 한 시점에서 견해의 차이를 가지고 함부로 ‘그놈 죽일놈이니 혹은 살릴 놈’이라고 단정하는 일은 매우 조심스러워해야 하지 않을까???


박순철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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