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락으로 맺어진 50년 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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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락으로 맺어진 50년 세월
어제는 참으로 의미 있는 모임을 갖게 되였습니다.
서울에 거주하는 김해 출신 축복가정들 중심으로 1963년부터 1968년까지 경남地區(지금의 교구) 김해 地域(지금의 교역)에서 목회를 하시던 김한수 前 협회건설대장님을 모시고 팔순을 기념 하는 조촐한 점심 식사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김한수 대장님께서는 저희들에게 김해에서 고생 많이 했다고 하시면서 부모가 자식에게 밥을 사주는 심정으로 오히려 저희들에게 밥을 사주셨습니다.
매년 생신 때 마다 그 분을 모시고 식사자리를 마련하였지만 이번에는 팔순을 기념하는 해이기 때문에 아주 의미 있는 특별한 모임이 되었습니다. 이제 그 분을 만난 지도 半 百年 의 세월이 지났지만 그 분과 저는 평생 동안 잊을 수도 없고, 뗄 수도 없는 특별한 인연을 갖고 50년 세월을 지내왔습니다.
1962년도 72가정으로 축복을 받으시고 임지로 배치된 곳이 김해군 이였는데 처음에는 김해군 이북면에서 개척을 하시다가 몇달 후 김해읍으로 옮기시어 개척을 시작하셨습니다. 사모님께서 그때 첫 애기를 낳으시고 먹을 것이 없어 일주일을 굶었다는 이야기를 저는 입교 후에 들었습니다. 참부모님께서 이 소식을 들으시고 애기 이름을 직접 지어주셨는데 72가정 돌림자인 惠자에 심을 植자를 넣어 金惠植으로 지어주셨다고 하셨습니다.
그 때의 그 후유증으로 사모님께서는 늘 몸이 좋지 않으셨는데 10년 전에 聖和하시어 이번 모임에는 건설대장님 한 분만 모시게 되어서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그 때의 첫 애기가 이제 51살의 중년 부인이 되었으니 세월이 흘려도 한참이나 흘렸지만 그 시절의 그 생활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1963년 9월 김해읍으로 교회를 옮긴지 몇 달 후에 중학교 3학년 까까머리 학생으로 입교를 하였습니다. 그 당시 교회는 중간에 미닫이가 있는 두 칸짜리 방이었는데 사모님께서 갓난 애기를 안고 계시는데 온화한 얼굴에 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하얀 피부의 美人이었습니다.
몇 달 후에 김해군에서 역사적으로 유명한 조개 무덤이 있는 조그만 야산 꼭대기에 비어있는 향교로 교회를 옮겼는데 야산 꼭대기라 우물이 없었습니다. 철없는 중학생이었지만 고생하시는 지역장님 부부를 위하여 무엇인가 하기는 해야 되겠는데 가진 것이라고는 도시락밖에 없어니 어머니가 매일 정성껏 싸주시는 도시락을 갖다드리기로 하고 곧 바로 실천에 옮겼습니다.
한참 잔뼈가 굵어지는 성장기의 나이인지라 밥을 먹고 돌아서면 배가 고프던 때였기 때문에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3교시가 끝나자마자 다른 학생들은 곧 바로 도시락을 먹어 치웠습니다. 저는 점심을 굶으니 너무 배가 고팠지만 다른 학생들이 도시락을 먹고 있는 교실을 슬며시 빠져나와 어린 학생의 도시락을 눈물로 드실 지역장님을 생각하면서 수돗가에 가서 수돗물로 빈 배를 채우고 기도로 배고픔을 달랬습니다. 이 배고픔의 생활이 내 신앙을 지치지 않도록 지켜 주었고, 지금까지 뜻 속에 남아질 수 있도록 해주는 생명줄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아침 등교 전에 언덕길을 올라 먼저 교회에 들러서 부엌에 도시락을 몰래 갖다놓고 학교에 갔다가, 방과 후에는 교회에 들려서 아래 마을에 있는 우물까지 내려가서 물통에 물을 담고 10여분 거리의 언덕길을 물통을 메고 올라와서 부엌에 있는 물통에 물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리고 원리강의를 들은 후 부엌에서 빈 도시락을 챙겨가지고 늦게 집에 돌아오면 전신에 힘이 쭉 빠지고 다리가 후들거렸습니다. 이러한 생활이 고등학교 졸업할 때 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반복되었습니다.
매일 늦게 귀가 하니 부모님으로부터 어느 한 날 야단맞지 않는 날이 없을 정도로 핍박이 계속되었지만, 매일 매일 은혜롭고 기쁜 마음으로 그 일을 반복하였습니다. 그 곳에서 한 겨울을 보낸 후 고등학교 입학 후에는 시내로 교회를 옮기게 되어 물통을 지는 것은 면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는 참부모님의 흑백 존영을 구하기도 어려운 시절이었는데도 참부모님을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저리고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눈물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참부모님께서 경남지구에 순회를 오시게 되었는데 교통비가 없었습니다. 하는 수없이 지역장님의 인솔 하에 새벽에 교회에서 출발하여 단체로 부산 지구본부까지 걸어서 갔습니다.
먼 길을 걸어갔지만 보고 싶고 그리운 참부모님을 직접 뵈올 수 있다는 기대와 즐거움에 다리 아픈 것도 잊어버리고 마냥 좋기만 하였습니다. 초량동에 있는 지구본부에 도착하여 성전 바닥에 엎드려 기도 할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습니다. 처음으로 참부모님을 직접 뵈올 수 있다는 기대와 감격스러움에 앞자리에 앉아서 기다리는 동안에도 가슴이 계속 두근거렸습니다.
참아버님께서 “고생의 백과사전이 되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 말씀은 “먹을 것이 없어 먹지 못해 배고픈 사람의 사정에 대해서 알고 싶으면 어디에 사는 아무개에게 물어 보아라” 할 수 있는 그 사람이 바로 그 분야의 백과사전이 되는 것이요, “교통비가 없어 걸어 다니는 사람의 사정을 알려면 어디에 사는 아무개에게 물어 보아라” 할 수 있는 그 사람이 바로 그 분야의 백과사전이 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굶고 계시는 지역장님을 위하여 배고픔을 참고 자기의 도시락을 갖다 드리는 사람의 사정에 대해서 알고 싶으면 김해 지역에 사는 아무개에게 물어 보아라” 할 수 있는 그 분야의 백과사전이 바로 내가 되어야 되겠다는 심정으로 고등학교 졸업 때 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도시락을 갖다드리는 일을 하였습니다.
저는 그 이후로 성장이 거의 멈추었지만 중학교 3학년 때까지만 해도 “장다리”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의 큰 키 덕분에 지장 없이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위장병으로 늘 고생도 하였지만 지금까지 큰 문제없이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 후 시내 중심지에 일본식 2층집으로 교회를 다시 옮겼는데 1층은 살림집으로 지역장님 가족이 사용하시고 2층 다다미 방 두 칸을 성전으로 사용하였는데 성전 옆에 조그만 공간이 있어 그곳을 숙소로 이용하였습니다.
일반 식구 보다는 학생들 전도가 잘 되어서 매일 매일 성전에 학생들이 가득 찾아와서 원리강의를 들었습니다. 경남지구에서 김해지역이 학생회 활동이 가장 잘되는 지역으로 소문이 나게 되었고, 그 당시 유종영 지구장님께서도 가끔 순회를 오셔서 격려의 말씀을 해주시고 가셨습니다.
가끔 교회의 쌀독을 들어다 보고 비어 있으면 조퇴를 하고 가방에 연필과 비누를 넣고서 면(面) 단위 지방으로 가서 사업(고학생)을 하여 쌀과 보리쌀을 구해서 쌀독을 채우기도 하였습니다. 김한수 지역장님께서는 언제나 정통적인 신앙을 강조하시고 교육하였기 때문에 여름 방학이 되면 어린 학생이었지만 하계 40일 전도에도 참여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원리공부를 시키신 덕분에 저는 1966년 전국성화학생원리시험에서 전국 일등으로 합격하여 9월호 성화지(통일세계 전신) 에 사진과 함께 기사가 실렸습니다. 그 후 1969년 울산 지구 총무부장으로 시무할 당시 비교적 어린 나이지만 제12차 협회원리시험에도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는 제1차 7년 노정 기간이었기 때문에 대학 진학이 허락 되지 않았고, 고등학교 졸업 후 곧 바로 개척 전도를 나가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저는 고등학교 3학년 겨울 방학이 시작되는 날 區域長(지금의 교회장)으로 발령을 받고 임지로 출발하였고, 임지 생활 중에 졸업식을 맞이하였습니다.
하루는 임지에서 지역본부에 왔다가 그날 밤 2층 방에서 잠을 자게 되었는데 임지에서 제대로 먹지 못한 탓인지 빈혈이 생겨 아침에 2층 나무 계단을 내려오다가 굴려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소리가 얼마나 요란하였는지 아래층에 계시던 사모님께서 깜짝 놀라서 달려오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어려운 교회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빈혈 약을 사다주셨는데 사랑이 담긴 그 약 한 병으로 빈혈이 깨끗이 사라졌습니다. 지금도 그 귀한 사랑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후 1968년 6월에 전국적인 인사이동으로 인하여 김한수 지역장님은 충남지구 천안 지역장으로 가시고, 저는 경남지구 동래 지역장으로 협회 발령을 받고 임지로 떠나게 되어 5년 동안 정들었던 지역장님의 가족과 눈물로 헤지어지게 되었습니다.
목회자와 식구의 단순한 관계만이 아니고 저의 어린 시절의 피와 살과 뼈가 될 수 있는 도시락을 3년 반을 드신 분이기 때문에 피와 살과 뼈를 나눈 특별한 사이가 되었고, 어디를 가든지 잊을 수 없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저와는 14살 나이차이 밖에 나지 않지만 늘 아버지 같고 아들 같은 父子의 관계가 되었습니다.
동래 지역장을 거쳐 경남지구 학생부장으로 시무할 당시 1969년 6월에 협회의 전국적인 기구개편으로 인하여 전국 8개 지구를 34개 지구로 개편되었는데 저는 새로 신설된 울산지구 총무부장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지구본부의 형편이 어려워 세끼 밥을 먹기에도 힘들어 아침과 저녁은 밥을 먹었지만 점심은 보리밥과 국수를 넣어 끓인 국수 죽을 먹고 매일 매일 가정방문을 하고 저녁에는 한건수 지구장님과 번갈아 가면서 원리강의를 하였습니다.
그 때는 형편이 어려워서 겨울에도 난방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너무 추워서 장미털실로 짠 속바지를 입어야 할 정도였습니다. 저는 공기총을 판매한 수당을 받아서 편물점을 하는 여자 식구에게 털실 속바지를 주문하여 그 당시 이리지구장으로 시무하시던 김한수 지구장에게 보내드리고, 한건수 울산지구장에게도 선물로 드렸는데 너무 너무 고마워 하셨습니다.
뜻이 급박하다고 생각한 저는 하루라도 늦게 군 입대를 하려고 1차 군 입대를 연기 하였으나 2차로 영장이 다시 나와서 하는 수 없이 입대를 하게 되였습니다. 강원도 최전방에서 군대 생활을 하였지만 저는 그래도 군대에서 배불리 먹을 수 있고, 따뜻한 내무반에서 잠을 잘 수 있었기 때문에 뜻을 위하여 고생하시는 공직자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고, 빨리 제대를 하여 뜻을 위해 다시 일을 해야 되겠다는 마음으로 3년의 軍생활을 하였습니다.
군대 생활 중에도 김한수 지역장님과 자주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교회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었고, 속 깊은 심정을 서로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 분이 이동되어 가시는 교회마다 저의 이야기와 자랑을 하셨기 때문에 그 교회의 성화학생들이 서로 얼굴도 모르는 사이지만 군대 생활을 하고 있는 저에게 위문편지를 보내주기도 하였습니다.
1973년 1월 軍 제대 후 저는 그 당시 종로교역장으로 시무하시던 김한수 교역장님의 권유로 종로교역 학생부장으로 근무하게 되었는데 파고다 공원에서 전도해 오는 새 식구들을 위하여 식사 시간을 놓치기도 하면서 매일 두 세 번씩 원리강의를 하다 보니 10개월 만에 체중이 10Kg가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 후 1974년부터 협회 본부 학생과장으로 근무하게 되었고, 일년 후 1975년 축복을 받았습니다. 부인전도 임지 생활 중에 전국적으로 A타입 성전이 건축되었는데 그때 김한수 교역장님은 협회 건설대장으로 발령을 받고 성전 건축을 책임지는 일을 하시게 되어 협회 본부에서 한 동안 다시 같이 근무를 하게 되었습니다.
한곳의 성전을 건축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200곳이 넘는 많은 성전을 짧은 기간 안에 최소한의 경비로 건축을 하기 위하여 불철주야 노력하신 결과 좋은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보고를 받으신 참부모님께서는 칭찬을 하시고 36가정에게만 주셨던 집 한 채를 상으로 주셨습니다.
지나고 보니 뜻 속에서 살아온 半 百年의 세월이 정말 눈 깜박할 사이에 지나 간 것 같은 느낌입니다. 성화학생 시절, 목회자와 지구(교구)부장, 군 생활, 협회 본부 학생과장, 문화과장, 순회전도단장, 인사과장, 총무차장을 거쳐 일신석재공예(주) 영업부장으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一信石材工藝(株)는 공예품(화병, 다보탑 등)을 생산하여 일본에 수출하던 회사였지만, 국내 건축석재 영업을 위하여 會社名을 (株)一信石材로 변경하고 청담동에 건축 석재 판매 영업소를 설치하여 판매영업을 시작하였습니다,
그 당시는 일신석재를 아는 건설회사가 없었지만 매일 매일 건설회사와 건설현장을 찾아다니면서 회사를 소개하고 영업을 하였습니다. 그 결과 한국전력 본사, 예술의전당, 국회도서관, 한국은행 별관, 공군 본부 등 대형건물 석 공사를 수주하여 시공함으로써 일신석재를 한국 최고의 석재종합회사로 성장시키는데 기여를 할 수 있게 되였습니다.
그 후 세계일보 창간멤버로 입사하여 총무부장, 기획부장, 광고관리부국장, 출판관리 및 출판판매부국장을 거쳐 국제연수원장으로 근무할 당시 일신석재는 3,700억의 빚을 지고 부도가 났습니다. 저는 파산직전에 이르게 된 일신석재를 수습하라는 재단의 명을 받고 법원의 허락을 받은 후 일신석재 수습책임자로 다시 가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일신석재는 내적으로는 언제 파산 될지 모르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직원들은 넋을 놓고 있었고, 외부적으로는 IMF 직 후의 건축경기 침체 등 악조건이 많았지만 청평 대모님의 많은 사랑과 모든 직원들의 뼈를 깍는 노력으로 5년 만에 부도를 극복하고 연 평균 47억의 이익을 내는 회사로 정상화되고, 법정관리를 졸업하여 오늘의 일신석재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잃어버린 회사를 하늘 앞으로 다시 찾아올 수 있도록 역할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더 없는 영광이요,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김한수 지역장님을 만나서 참부모님을 알게 되어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었고, 원리를 통하여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축복을 받고 아들, 딸을 낳아서 훌륭하게 잘 키우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반듯하게 잘 자라서 2004년에 아들이 2세 가정 축복을 받았고, 2008년에는 딸이 2세 가정 축복을 받아서 둘 다 예쁜 가정을 이루어 아들 딸 낳고 알콩 달콩 잘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같이 부족한 사람이 하늘의 귀한 부름을 받아 많은 공직 생활을 할 수 있었고, 특히 협회 본부와 하늘이 세우신 기업에 근무하면서 섭리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게 되었던 이 모든 것이 저를 제대로 잘 지도해 주신 그분의 사랑과 정성 덕분이라 생각하고 늘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5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김한수 前 협회건설대장님은 팔순을 맞이하시고 16살의 어린 학생이었던 저는 이제 3명의 손자 손녀가 있는 66살의 할아버지가 되었지만, 지금도 한결같이 늘 염려해 주시고 친 아들을 부르듯 “이덕“이라고 제 이름을 부르시고 아무런 부담 없이 편하게 저를 대해주십니다. 그리고 찾아뵙을 때 마다 부모의 심정으로 무엇이라도 하나 더 챙겨주시려고 마음을 쓰고 계십니다.
지나고 보니 참으로 긴 세월 동안 보살펴 주시고 베풀어 주셨는데 그 사랑에 대해서 보답도 못해 드리고 늘 받기만 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같은 서울에 살면서도 무엇이 그리 바쁜지 모르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찾아뵙지 못한 것에 대하여 늘 죄송하고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 분은 팔순의 나이지만 운동으로 다져진 몸으로 아직도 중년 못지않은 체력을 갖고 계시고, 전도에도 열심이어서 이번에도 협회 원서를 20명이나 받는 열정을 보여주셨습니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오래 오래 건강하시고 우리들의 신앙의 中心이 되어주시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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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항삼님의 댓글
존경하는 최이덕 전회장님
흘러가는 강물같이 굽이굽이 흐르는 진솔한 필치가 심정의
가슴 속을 애잔하게 하여 눈물이 왈칵 쏟아지네요.
초창기 대선배님들의 전도현장 초근목피로 험난한 여정을
따라오시던 눈물없이 볼 수 없던 드라마틱한 편린들이
오늘의 우리들 가슴을 쥐어 짜는 느낌이군요.
청춘을 초개와 같이 버리고 순종하시던 선배님들의 전설 같은 일화가
파노라마처럼 스칩니다.
참으로 귀하신 김한수 선배님을 천륜의 인연과 사랑으로 모시고 계신다니
정말로 자랑스럽습니다.
속속 귀한 선배님들의 간증이 홈에 게재되어 후배들의 가슴을 훈훈하게
했으면 좋겠네요.
감동어린 글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정해관님의 댓글
새롭게 최이덕 회장님의 간증을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제가 이곳 우리 사랑방을 초기에 접하면서, '노블리스 오브리제....'제하의 글에서, 우리 가정회의 노블리스는 전-현직 회장. 공직자. 교직자. 기관기업체 임원 등을 거론하면서, 남다른 사명감을 강조한 바 있습니다.
말하자면 최이덕 전임회장님과 같은 분들의 남다른 활동을 기대한 셈이지요.
솔선수범하시는 모델이요 典範이심에 틀림없습니다.
혹자는 사실의 기록조차도 자화자찬으로 평가절하하는 경우도 없지 않겠지만, 괘념할 일이 못된다고 생각 합니다.
귀중한 증언들을 가족소개난( 우리 홈페이지)에 올려주심도 좋은 방법이며, 그런 기록이 결국 <증언집>이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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