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분류
無語別 : 한국여성 최고의 이별시?
컨텐츠 정보
- 0댓글
-
본문
無語別(무어별) -- 林悌
十五越溪女(십오월계녀)
羞人無語別(수인무어별)
歸來掩重門(귀래엄중문)
泣向梨花月(읍향이화월)
열다섯 먹은 아름다운 아가씨가
낯 부끄러워 말 못하고 헤어졌네
돌아와서 겹문 걸어 잠그고
달에 비친 배 꽃을 향해서 운다.
(越溪女) 吳姬越女. 오나라와 월나라에는 미인이 많다고 하여 생긴 말. 여기서는 ‘아리따운 아가씨’로 옮김이 무난할 듯.
(無語別) 말 한마디 못하고 헤어지다.
-임제는 조선중기의 문인으로 호는 白湖인데, 당대의 명문장가로 이름을 날렸고, 호방하기로 유명한 작품을 남겼다. 특히 黃眞伊의 이름을 듣고 송도를 갔다가 그의 무덤에서 시조를 읊어서 슬픔을 표시하고 또 글을 지어서 제주를 드린 일화는 유명하다.
-위의 작품도 타인은 흉내도 내지 못할 남녀의 이별을 소재로 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여성 쪽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간결한 표현으로 말 못하는 아가씨의 심정을 이처럼 잘 표현한 작품은 예전에는 없었을 것이다.
관련자료
댓글 4 개
정해관님의 댓글
<한우가(寒雨歌)>
조선 선조 때의 문인 임제(林悌)와 평양 기생 한우(寒雨)가 주고받은 시조.
《해동가요》 《청구영언(靑丘永言)》 등에 전한다. 평양 명기(名妓) 한우를 만난 임제가,
북천(北天)이 다커늘 우장(雨裝) 업시 길을 나니/
산의 눈이 오고 들에 비 온다/
오는 비 마자시니 얼어 갈가 하노라"라고 읊자,
한우는 이에 화답하여
"어이 얼어 자리 므스 일 얼어 자리/
원앙침(鴛鴦枕)·비취금(翡翠衾)을 어듸 두고 얼어 자리/
오늘은 비 맛자시니 녹아 잘가 하노라"
라고 읊었다. 임제가 '한우'라는 기생 이름에 빗대어 찬비라 하자, 한우도 찬비에 빗대어 원앙침 비취금에 녹여 자라 한 것이다. 남녀간에 주고받은 시조이나 속되지 않고 아취(雅趣)가 있다.
조선 선조 때의 문인 임제(林悌)와 평양 기생 한우(寒雨)가 주고받은 시조.
《해동가요》 《청구영언(靑丘永言)》 등에 전한다. 평양 명기(名妓) 한우를 만난 임제가,
북천(北天)이 다커늘 우장(雨裝) 업시 길을 나니/
산의 눈이 오고 들에 비 온다/
오는 비 마자시니 얼어 갈가 하노라"라고 읊자,
한우는 이에 화답하여
"어이 얼어 자리 므스 일 얼어 자리/
원앙침(鴛鴦枕)·비취금(翡翠衾)을 어듸 두고 얼어 자리/
오늘은 비 맛자시니 녹아 잘가 하노라"
라고 읊었다. 임제가 '한우'라는 기생 이름에 빗대어 찬비라 하자, 한우도 찬비에 빗대어 원앙침 비취금에 녹여 자라 한 것이다. 남녀간에 주고받은 시조이나 속되지 않고 아취(雅趣)가 있다.
정해관님의 댓글
황진이와 백호 임제
고수(高手)가 고수를 알아보고, 최고(最高)의 경지에 다다른 자가 최고를 알아 보는법, 백호(白湖)임제(林悌,1549~1587)선생이 언제 한번 기회를 내어 황진이(黃眞伊)와 술잔을 주고 받으며 문자 그대로 자웅을 겨루려 하였다. 그러다 마침 평안도사로 벼슬을 받고 임지로 부임하던 길에 병에 걸려 일찍 생을 마쳤다는 기생 황진이 소식을 듣고 무덤 앞에서 그를 추모하며 읊었다는 시조는 유명하다.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웠난다.
홍안(紅顔)을 어디 두고 백골(白骨)만 묻혔난다.
잔(盞)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퍼하노라.
조선시대 최고의 풍류시인 임제는 벼슬길을 멀리하며 기행과 방랑생활을 일 삼았다. 재색을 겸비한 천하의 황진이가 인생 사십에 병에 걸려 쓸쓸한 산기슭에 묻히느니 사람들 왕래가 빈번한 대로 변에 묻어 주기를 유언한대로 송도(松都) 대로 변에 묻혔는데 조선의 대문장가가 조선 최고의 기녀무덤 앞에 넋을 달래며 제문을 짓고 제를 지냈던 것이다.
황진이 살았을적 고대 했던 조우를 바랬건만 뜻을 이루지 못함을 아쉬워 하며 그 기와 예의 일찍 저버림을 탄식하였다. 이 일이 훗날 조정에서 말썽이 되어 그는 벼슬이 좌천되기도 하고 파직도 당하였다. 그렇찮아도 속박과 낡은 관습을 싫어 하던 임제는 동서(東西)당파싸움에 날을 지새는 조정의 현실을 개탄하며 전국의 명산대천을 유람하며 기생, 승려, 묵객 등 당대를 주름잡는 자들과 교우하였다.
천재는 단명(短命)이라 했던가! 황진이처럼 39세라는 짧은 생을 살고 간 선생은 수 많은 기녀들과의 러브스토리, 숱한 일화(逸話)만치나 훌륭한 작품을 후대에 남기었다. 위에 든 유명한 황진이 무덤 앞에서 읊은 시조를 비롯, 기생 한우(寒羽)와 주고 받은 형식의 한우가(寒羽歌)등 1천여수의 시와 <남명소승(南溟小乘)>이라는 제주도 여행기, 의인화법으로 당대를 풍자한 <수성지(愁城誌)>〈화사(花史)〉<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은 조선기행문학의 최고봉으로 손꼽히고 있고〈임백호집(林白湖集)〈부벽루상영록(浮碧樓觴詠錄)>등 등 이루 헤아리기가 힘들 정도다.
본관이 나주(羅州)인 선생을 기념하는 곳이 그가 태어난 나주시 다시면 회진(會津)마을에 자리하고 있다. 한쪽에는 기념관이 그리고 한쪽에는 운치있기로 이름난 영모정(永慕亭)이 한데 어루러져 있다.
고수(高手)가 고수를 알아보고, 최고(最高)의 경지에 다다른 자가 최고를 알아 보는법, 백호(白湖)임제(林悌,1549~1587)선생이 언제 한번 기회를 내어 황진이(黃眞伊)와 술잔을 주고 받으며 문자 그대로 자웅을 겨루려 하였다. 그러다 마침 평안도사로 벼슬을 받고 임지로 부임하던 길에 병에 걸려 일찍 생을 마쳤다는 기생 황진이 소식을 듣고 무덤 앞에서 그를 추모하며 읊었다는 시조는 유명하다.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웠난다.
홍안(紅顔)을 어디 두고 백골(白骨)만 묻혔난다.
잔(盞)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퍼하노라.
조선시대 최고의 풍류시인 임제는 벼슬길을 멀리하며 기행과 방랑생활을 일 삼았다. 재색을 겸비한 천하의 황진이가 인생 사십에 병에 걸려 쓸쓸한 산기슭에 묻히느니 사람들 왕래가 빈번한 대로 변에 묻어 주기를 유언한대로 송도(松都) 대로 변에 묻혔는데 조선의 대문장가가 조선 최고의 기녀무덤 앞에 넋을 달래며 제문을 짓고 제를 지냈던 것이다.
황진이 살았을적 고대 했던 조우를 바랬건만 뜻을 이루지 못함을 아쉬워 하며 그 기와 예의 일찍 저버림을 탄식하였다. 이 일이 훗날 조정에서 말썽이 되어 그는 벼슬이 좌천되기도 하고 파직도 당하였다. 그렇찮아도 속박과 낡은 관습을 싫어 하던 임제는 동서(東西)당파싸움에 날을 지새는 조정의 현실을 개탄하며 전국의 명산대천을 유람하며 기생, 승려, 묵객 등 당대를 주름잡는 자들과 교우하였다.
천재는 단명(短命)이라 했던가! 황진이처럼 39세라는 짧은 생을 살고 간 선생은 수 많은 기녀들과의 러브스토리, 숱한 일화(逸話)만치나 훌륭한 작품을 후대에 남기었다. 위에 든 유명한 황진이 무덤 앞에서 읊은 시조를 비롯, 기생 한우(寒羽)와 주고 받은 형식의 한우가(寒羽歌)등 1천여수의 시와 <남명소승(南溟小乘)>이라는 제주도 여행기, 의인화법으로 당대를 풍자한 <수성지(愁城誌)>〈화사(花史)〉<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은 조선기행문학의 최고봉으로 손꼽히고 있고〈임백호집(林白湖集)〈부벽루상영록(浮碧樓觴詠錄)>등 등 이루 헤아리기가 힘들 정도다.
본관이 나주(羅州)인 선생을 기념하는 곳이 그가 태어난 나주시 다시면 회진(會津)마을에 자리하고 있다. 한쪽에는 기념관이 그리고 한쪽에는 운치있기로 이름난 영모정(永慕亭)이 한데 어루러져 있다.
-
이전
-
다음
가정회 은행계좌
신한은행
100-036-411854
한국1800축복가정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