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류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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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내 유품을 정리한다면 애장품 1호는 무엇일까? 그것은 만 3년간 중동과 북아프리카 선교사로 여러 도시를 방문할 때 생사고락을 같이한 검은색 서류가방이다. 내가 하늘을 날든 바다를 항해하든 육로의 여행을 하든 항시 내 옆을 지켰다.
나의 선교임지는 중동지역 선교본부가 있었던 그리스를 비롯하여 터키, 키프로스, 이란, 이스라엘, 요르단, 레바논 등 6개국이었는데, 같은 지역을 맡은 선교사가 개인사정으로 사양하는 바람에 수단, 예멘, 튀니지와, 모로코, 이집트 등 5개국이 추가되어 도합 11개국이었다. 내가 할 일은 각 나라에서 수고하는 일본축복가정 부인들인 선교사들을 격려하고 신앙상담을 해 주며 그 나라에 선교가 활성화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이었다. 가는 곳곳마다 한국인은 나 혼자뿐이었다. 한국말을 알아듣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내 나이 삽십대 중반부터 꿈을 꾸면 꼭 영어로만 말해야 하는 희한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됐다. 영어로 묻거나 답변하지 못하면 위험한 사항에 처해 가위에 눌려 진땀을 흘리는 상황이 반복된 것이다. 이에 자극을 받아 영어회화 습득을 위한 교재를 구입도 해보고 수시로 미군방송채널인 ‘AFKN’을 틀어 보기도 했다. 그러나 작심삼일이 되기 십상이었다. 우리 통일교는 어차피 온 세계에 선교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되풀이하니 그런 꿈도 꾸게 되는 개꿈에 불과하다고 대수롭게 여기기도 했다.
그러다가 사십세를 넘어서면서 영어로만 말해야 되는 희한한 꿈들은 나타나지 않했다. 45세 되던 해에 해외선교사로 임명을 받게 되었다. 그때 아차! 내가 경솔했구나. 이날이 올 것을 알고 예비한 하나님의 배려를 뒤늦게 깨달게 된 것이다.
어찌 되었건 나의 선교임지 순회일정을 시작되었다. 그 서류가방에는 나의 귀가 되고 입이 되어줄 영한사전과 한영사전을 중심하고 자료보존의 카메라와 녹음기, 필기도구가 들어있었다. 여기에 강렬한 태양으로부터 눈을 보호해줄 선글라스에 그 나라 지도나 안내책자가 들어 있다.
영작의 5형식 기본문장을 익힌 다음 단어만 대입하고 의문사를 내세운 의문문 기본형을 소화하면 먹고자고 가고오는 일상생활에 불편함은 없다. 그러니 서류가방이 손잡이가 손에 들리면 든든해진다. 그 가방을 잃어버리기라고 하는 날에는 큰일이다 싶어 애물단지로 여겼다.
이 가방은 그리스의 아테네에 살면서 곳곳을 누볐다. 서해안을 일주하고 알바니아에 인접한 코르푸 섬의 케르키라까지, 코린토스로부터 동해안을 거슬러 터키 이스탄불까지 버스로 오갔다. 이집트 카이로 시내도 수차례 방문하면서 시나이 반도를 오갔다.
오랜 세월 살다시피 한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을 골골샅샅이 다녔고 북쪽의 요르단 강 시원지로부터 남쪽의 네겝사막까지 예수님의 체취가 남아있는 모든 곳이 이 가방의 카메라가 현장을 남겼다. 구약과 신약의 역사의 흔적이 스며있는 요르단과 터키, 레바논, 시리아 그리고 이란 국가들의 가로세로를 이 가방은 누볐다.
3년여의 일정의 피날레는 이집트 카이로에서 이스라엘 -요르단 -시리아 -터키 이스탄불에 이르는 코스였다. 사도바울의 선교가 시작된 키프로스와 로마로 압송되다 태풍으로 표류된 몰타 섬도 예외가 아니었다.
거의 지중해 연안의 해안에서 오색바다를 즐겼다. 튀니지아, 모로코, 이집트, 이스라엘, 레바논, 터키, 그리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의 해안에 부딪쳐 피어나는 하얀 물거품을 파란 화폭에 쏟아 붓는 순간들을 이 가방은 보고 또 보았다. 백나일과 청나일이 만나는 수단의 카튬과 시바여왕의 전설이 살아숨쉬는 예멘에서도 이 가방은 바늘에 실가듯 정다이 몸에 붙어 다녔다.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이탈리아 로마, 스페인의 세비야와 마드리드가 일정에 포함된 것은 저렴한 비행기표를 구입하기 위한 궁여지책에서 온 어부지리이고 미국 워싱턴과 뉴욕의 방문은 행운권 당첨으로 인한 보너스 여행이었다.
만 삼년의 여행에서 이 가방은 갖은 체험을 맛보았다. 로마가톨릭 교황 요한 바오르 2세가 집전하는 바티칸 성 베드로대성당의 성탄절 자정미사에 참석하였고 이스탄불에서 정교회 세계총대주교 바르톨로메오스 1세가 베푸는 오찬회에 초대되기도 했다. 문선명 총재와 한학자 총재의 저택인 이스트가든 식탁에도, 워싱턴 공관인 제퍼슨하우스에도 이 가방은 놓여졌다. 수단의 스하르 다하브 전대통령, 시리아와 예멘의 최고회교지도자를 예방할 때도 이 가방은 임무를 성실히 수행했다.
세계 10대 불가사의 범주에 들어가거나 탈락되기도 하는 쿠푸왕의 대피라미드, 성소피아 사원, 로마의 콜로세움, 고대도시 페트라,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의 등대, 에펠로스의 아르테미신전, 델포이 아폴론 신전,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상, 시리아의 팔미라 고도 에서도 이 가방은 현장을 본 증인이다.
중동지역의 유명한 이슬람 사원들도 예제없이 들어갔다. 예루살렘의 바위의 돔과 알아크사 성원, 세계 2위의 규모를 자랑하는 모로코 카사블랑카의 하산2세성원, 시리아 다마스쿠스의 우마이야성원, 이집트 카이로의 모하메드 알리성원, 이란 이스파한의 이맘성원, 블루 모스크란 애칭을 가진 터키 이스탄불의 술탄아흐메트 성원, 예멘의 사나와 수도인 수단의 카튬에서도 제일 큰 성전에 들어가 종교화합을 염원하는 평화의 기도를 하나님께 올렸다.
모든 나라에 가면 국립박물관 견학은 필수 코스였다.
이 가방이 수난을 당한 적이 있었다. 이란의 테헤란의 골레스탄 왕궁 정문에서 사진을 촬영하다 예닐곱 총을 겨눈 군인에 포위되어 강제로 끌려가 분실될 뻔 했다. 요르단 암만의 이라크대사관에서 가방을 검문한 경비병이 녹음기와 카메라를 발견하곤 기분이 언짢도록 호들갑을 떨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공항 출국장에서 여권에 아랍권 시리아나 수단의 입국사증이 찍힌 내 여권을 확인하고 테러용의자 수준의 심문을 하면서 샅샅이 조사당했다.
나의 최고의 비서관이었던 이 서류가방은 영등포 전철역 통로의 쓰레기통 출신이다. 출국준비를 위해서 가방을 구입하려 시장에 가던중 뭇사람들이 오가는 길체의 둥근 쓰레기통에 던져진 가방을 무심결에 발견했다. 언뜻 쓸만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주워 유심히 앞뒤를 살펴보니 새것처럼 멀쩡했다. 귀퉁이 한 곳에 쉽게 눈에 띄지 않는 작은 흠집이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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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관님의 댓글
자랑 스럽 습니다.
회고록 건은, 수필문학이니 단편 소설로 써서 수준높은 글로 만들자는 말씀이 지당하오나, 그럴 경우 극히 제한적이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형제들의 생각과 삶의 내용이 중요하며 그를 표현하는 것은 별개라는 생각으로 접근하고 싶습니다. 있었던 그대로의 삶의 발자취를 표현의 기교에 구애받지 말고 진솔하게 나타내 준다면 누구라도 참여할 수 있겠다고 생각 합니다.
<1800가정 문학회> 동아리 발상은 매우 시급하고도 중요한 과제라 생각 됩니다.
好山會니 문학회니 홈관리회니 부지런히 만나고 정을 나누면 좋겠습니다. 댓글 1호의 敎酒님께서도 許하실 것으로 사료 됩니다.
이태곤(대숲)님의 댓글
이 글의 주제는 "집을 짓는 사람이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도었다. 이것이 주께서 하신 일이요, 우리 눈에는 놀랍게 보인다.(마가복음 12:10)의 성구입니다. 더불어 원리강론의 재림론의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마 21:33-46, 눅 20: 9-19)를 인용해 본 수필이 된 겁니다. 뭘 자랑하려고 쓴게 아닌 것입니다.
꽤 오래동안 이 가방을 떠올리며 이런 작품을 써야겠다고 작심하고 두달전 완성하여 오산문학에 실린 것입니다.
이 작품은 후반부의 반전이 묘미입니다. 처음부터 이 사실을 얘기해 버리면 아무 재미도 없겠지요. 장황히 설명한 것은 이 반전, 쓰레기통 출신이란 것을 극대화하기 위한 작전이죠.
지난번 후목 시인님이 왜 갑자기 한꺼번에 글을 많이 올렸느냐고 책망하셨는데, 욕심이 생겼습니다. 우리 가정회에서 형제들의 생애를 글로 써 단행본을 내자는 정책입안에서 그 방법을 무턱대고 쓸 것이 아니라 각자 잊을 수 없는 사건을 참부모님의 말씀이나 고전에 접목시켜 수필문학이나 단편소설로 만들면 더 흥미진지하고 수준높은 글로써 자손만대 축복조상의 귀한 발자취를 남길 수 있을 것입니다.
가장 좋은 점은 이렇게 한 사건을 갖고 글을 쓰며 아주 쓰기 쉽고 자기의 생각을 많이 삽입하여 글의 묘미가 훨씬 살아 남는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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