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그리고 눈물의 대학 졸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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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그리고 눈물의 대학 졸업장
고향집을 찾아 아버지께 대학등록금을 낸다고 말하여 아버님의 전 재산인 소를 팔아주신 200만원을 받아들고
부모님을 속이고 하직인사를 드리고 집을 나서 바로 전라남도의 제일 오지 진도로 가기위해 버스에 몸을 실었다. ‘이 죄인을 용서 하소서 ! 나는 부모 형제보다 나보다 못한 남을 위해 내 인생을 바치리라. 내 삶이 남보다 못한 상황이 되었을 때 나는 대학을 가리라.’
해남에 도착한 버스를 뒤로 하고 2시간을 기다려 똑딱선 배로 옮겨 탄 나는 울고 또 울었다.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이날따라 내리는 이슬비가 더욱 내 슬픈마음을 적셨고 뱃고동소리는
내 심장을 멎게 하고도 남았다.
진도버스정류장에 도착한 나는 어디로 갈까 망설이다. 큰길을 따라가다 여기다 생각하고 멈춘 곳이
의신면 칠전리다. 이장님댁을 방문했다.
이장님께 찾아온 목적을 말했더니 고맙게도 이장님 집에서 기거하라고 했다.
다음날부터 이장집 마당 청소도 하고 소가 먹을 풀도 배어오고 집안일을 도왔다.
밤이면 마을회관에 칠판을 걸고 매일 20여명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한문도 영어도 가르쳤다.
처음에는 이해가 안된다며 반대했던 마을 사람들도 몰려와 나를 도와주었다.
밤이면 떡도 가저오고 과일도 주셨다.
마을 처녀들이 더욱 관심이 많았고 앞을 다투어 반찬을 만들어 주었다.
‘무엇이 행복인가? 많이 가졌다고 권력이 있다고 절대 아니다. 나는 비록 어설프고 가진 것도 명예도 없지만
저렇게 빛나는 눈망울을 굴리며 적은 것을 받고도 행복해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내 마음보다 행복할까?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 전할까 ?
가슴속 깊이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에 입을 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
그러나 아는 사람이 없는 고로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지는 못 하고 벅찬 마음을 짓누를 수 없어 뒷산에
올라 수많은 나무들을 놓고 말씀을 하며 나무와 나무사이로 닥아온 성공한 미래의 상상의 날개를
펼쳐보며 신나는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너무 배가고프다. 굶기를 밥먹듯하니 허기가 저서 길을 걸을 수 없다.
생각이 온통 음식을 먹는 생각뿐이다. 진수성찬이 눈에 선하다.
지나다보니 어제밤 고사를 지내며 진설했던 떡과 밥이 짚을 깔아 놓은 길가에 있다 .
잠시 주위를 돌아보고 좌우를 살피던 나는 정신없이 먹어댔다.
이젠 살 것 같다. 이때 하장로 사건이 터졌다. 하장로는 꿈에서 ‘너도 아브라함처럼 자식을 바처라
하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이다.
다음날 그는 꿈 지시대로 물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고 아이를 물속에 집어넣었다.
그 아이는 죽었다. 하장로가 아이를 죽인 것이다.
그는 그 자신을 아브라함과 동일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소문은 온 동네에 퍼졌다. 그리고 그 소리를 들은 동네 사람들이 나와 박길년씨를 죽이겠다고
몽둥이를 들고 마을 청년들이 나를 찾아 나선것이다.
우리는 동네 유지를 만나 설득해 보려 했지만 그들은 막무가내였다.. 할 수 없이 마을을 빠저 나와
진도읍에 다 쓸어져 가는 가정집을 얻어 의지할 곳을 마련하고 진도고등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전도하기로 작정했다
나는 진도고등학교 앞에서 하교를 기다리다 지나가는 여학생(김정숙)에게 접근 5분만 시간을 달라고
하여 찐빵집에서 빵을 대접하며 말씀을 전했다. 의외의 성과가 있었다.
다음날 친구들을 대려오기로 약속하고 해어 졌다.
하나님의 역사인지 고등학교 2년인 정숙학생은 매일 10여명의 학생들을 대려 왔다.
온갖 정성을 다하며 울면서 미친듯이 강의를 했다.
학생들은 감명을 받고 같이 울어 성전은 눈물바다가 되었다.
강의가 끝나면 4km나 되는 집까지 바래다 주면서 또 말씀을 전했다
하루 종일 정숙이를 생각하며 다음에 만나면 무슨 말씀을 할까 생각하며 나날을 보냈다.
찾아온 학생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학생들이 돌아가고 나면 너무 허전하고 외로웠다.
더구나 먹을 것 마저 없으니 삶이 더욱 피곤하게 느껴젔다.
허기를 채우려 성지에 올라가 기도하고 소나무 잎을 한 바구니 잘라왔다.
솔잎을 솥에 쪄서 말려가지고 갈아서 미수가루를 만들었다.
허기진 긴 밤에 이것을 먹었다.
그리고 밀가루를 사다가 쑥을 캐가지고 살마서 말려가지고 갈아서 버무려 먹었다.
얼마나 꿀맛인지 밤이면 허기진 베를 움켜쥐고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하늘이여 어서 기적을 보여주소서!
진도군민이 하나님을 환영 할 수 있는 그날을 만들어 주소서....
태양은 곡절이 많습니다. 고로 빛을 냅니다..
이 고통과 아픔의 기록이 먼 훗날 역사적 전통이 되게 하소서.............
어느날, 진도고등학교에서 돌아오니 최용석 지구장님께서 전남 함평에 가서 입회원서와 전도배가운동을
하라고 특별지시의 편지가 와있다.
정이든 학생들의 아쉬운 눈물을 뒤로하고 함평에 도착해보니 김덕수교회장님과
학생들 몇 사람이 식구의 전부였다
매일 매일 몰려오는 학생들에게 원리강의를 했다.
그러나 협회에서 지시한 협회원 배가운동을 달성할 길이 없다
대량 입회원서를 받으려고하니 사진기가 필요하고 입회비 그리고 사진을 위한 돈이 필요하다.
그러나 나는 돈을 만들어낼 방법이 없어 궁리 끝에 그때 경찰국에서 만들어준 반공강사 위촉증을 가지고
고창집을 방문했다.
부모님께 전남경찰국에 취직을 하려는데 섭외비가 필요하니 200만원만 달라고 했다.
아버지는 반대하셨지만 어머니는 빚을 내 200만원을 마련해 주셨다. 나는 그 돈을 가지고 함평군 면면촌촌을
방문하며 입회원서를 받고 사진을 찍고 마을 사람 식사대접을 하고 아침부터 밤늦게 까지 최선을 다했다.
성전바닥에 종이를 깔고 손가락을 잘라 혈서(천국완성은 성호갑이가)를 써 식칼로 꽃아 놓고
미친듯이 활동했다.
밤이면 밤하늘에 별과 달을 바라보며 자식을 원망할 부모님을 생각하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가슴에 저미는 아픔을 견딜 수 없어 뒷산에 올라 통곡하고 눈물을 씹으며 성공을 향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며 입술을 께물었다.
부모님을 두 번씩이나 속여 부모님가슴에 한의 못을 박은 사나이...먼 훗날 하나님의뜻을 이루어놓고 주권복귀의
주인공으로 만민이 우러러보는 위대한 인물이 되어 고향에 금의환향하여 자랑스러운 아들로 효도하며 모시리라
생각하며 눈물의 밤을 보냈다.
입회원서를 받기위해 해가 저물어 캄캄한 밤이 되었는데도 한집 더 한집 더 하면서 가가호호를 방문했다.
월말에 입회원서를 가마니에 담아 제출했다. 남들은 서류봉투에 몇 장의 입회원서를 가지고 왔는데 나는 가마니에 입회원서를 담아 제출했다.
최창림 지구장님은 물런 전국의 화재가 됐다.(지금도 강판근 분봉왕은 함평교회 시무시절 그때 칼과 혈서를 보았다고 간증함) 1967 10월 부흥회 때다. 스피커를 지게에 짊어지고 거리를 휩쓸며 노방강의를 했다
함평공원과 오일시장 등 사람이 모이는 장소면 어떤 반대도 물리치고 칠판을 걸어놓고 신나게 원리강의를 했다.
나는 정말 정신 이상자처럼 완전히 미처 있었다. 이때 눈에 보이는 것은 내손으로 이룬 지상천국뿐이고 통일교회가 진짜가 아니면 내가 진짜로 만들어 놓겠다는 용광로처럼 타오르는 야망 뿐 이였다.
이때 박판성 김경희등 많은 학생들이 연결되었다. 이들을 중심하고 원리강의를 했고 학생들이 20-30명씩
모여들어 교회는 사람이 들어갈 곳이 없었다.
집이 그립고 부모형제가 그리워 도저히 견딜수가없다.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기름지고 따뜻한 쌀밥이 눈에 선하다.
그러나 집에 가려고 하니 차비도 없고 부모님의 한서린 회초리가 두려워 용기를 낼수가 업다.
그러나 너무 그리워 미칠 것 같다. 동생들이 눈에 선하다. 나는 걸어서 고창까지 가기로 결심하고 함평을 출발
영광과 대산을 거처 고창에 도착하여 집에 들어가려니 마음이 아파 견딜 수 가없다.
어떻게 부모님 얼굴을 대 할까.... 고창에서 걸어서 태봉산을 지나 집에오니 어머니 혼자 계셨다. 청천병력 같은 소리를 지르며 너는 내 자식이 아니야 ! 빨리나가. 꼴도 보기실어..... 다시는 집에 발 거름도하지마 자식이 아니라
원수야 ......가슴에 영원히 지울 수 없는 말씀을 내 얼굴을 보자 한없이 하셨다.
아버지 오시기전에 나가............ 나는 가슴에 피멍을 잠재우고 서글픈 심정을 달래고 달래며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 집을 나섰다. 나는 지금도 이것이 가슴에 서려있다.
부모님에게 잘못하고 동생들을 보살피지 못한 것이 한이되어 부모님이나 동생들에게는 할 말을 못하고
어떤 경우에도 참고 살아가고 있다.
집에서 고창까지 걸어 오면서 울고 또 울어 비처럼 흘러내리는 내 눈물이 땅을 적셨다.
더구나 태봉산 정상에서 멀리 내려다보이는 집을 바라볼 때 땅도 울고 나무도 울고 지나가던 참새도
나를 따라 우는듯 했다.
차비가 없는 나는 고수면 남산리를 거처 대산면 매산리를 지나서 마을에 들어가 고학생인데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왔다고 하며 쌀을 좀 달라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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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철님의 댓글
자꾸 나자신과 오버랩되는 장면에서 오히려 괴로운 과거가 되었습니다.
현재가 자랑스럽다면 과거가 찬란할 것인데,
본인의 현재는 남모르는 속앓이를 하면서 남은 여생을 지키려 합니다.
1966년 설날 이른 아침, 식구들은 큰댁에 제사지내러 가고,
옷보따리, 이불보따리를 싸들고, 가출 아닌 가출을 하면서 시작된,
일년 6개월의 전도사, 구역장, 교회총무 생활이
이후 저의 신앙생활의 튼튼한 중추가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하기 무섭게 환란과 핍박 속에 뛰어들었지만
큰 실적을 내지못하고 대학에 진학하였고,
교육자로 새로운 인생을 35년간 살았습니다.
돌아 보아 나는 목회자로 적임자가 아니었음을 자인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교편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나의 위치에서
하늘의 주소가 어디인지 찾으려 합니다.
성회장님의 글을 읽으며 이정표를 발견할 것으로 예감합니다.
부디 하늘의 눈물이 없는 곳이기를 빕니다.
성호갑님의 댓글
우리가 함께 자취생활 하면서 생활비 다 교회에 보내고 교회에 쌀이 없으면
학교는 결석하고 화순 광산 저멀리 장성까지 돌고 돌아 쌀을 교회 쌀독에 채우고
우리는 밀가루로 죽을 만들어 함께 먹으면서도 즐거워 어디서나 아버지를 외치며
화장실에서도 아버지 부르던 화장실 신앙이 그대와 나의 영원한 인연이요 내가 힘들 때
나를 위로하고 내가 기쁠때 나보다 더 기뻐해준 친구가 있기에 나는 더 행복 합니다.
나는 아직 배가 고프다네 가슴에 저미는 욕망을 짖누르며 내 등을 타고 세계를 향해
날아다닐 후대를 생각하며 오늘도 모양성 기슭에 정성의 단을 쌓고 있답니다.
김명렬님의 댓글
초창기 시절의 회고담 잘읽었습니다. 성화학생 시절에도,
함께 부흥회를 위해사업하면서 교회생활이 거의 전부인시절이었지요.
나역시 부모님이 소팔아 교육대학 보내 준다는 걸 팽게치고 개척나가고,
그때당시 무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그후 어떤이는 교수가 되고 판사가되고 서기관이 되고
교회봉사자사가 되고 학교에근무하고 뿔뿔이 헤어졌지요 ?
우리에겐 지난날의 한을 귀한 보람과 기쁨으로 승화시키는 지혜가
우리에게 더욱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듭니다.
소상호님의 댓글
저도 청운의 꿈을 품고서
대학을 포기하다
다시 1800가정축복을 받고서 29세때 10개월공부하여
건국대학 법정계열에 입학하였습니다
젊음의 꿈에서 대학을 포기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받친다는 결의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하늘에 받친 우리 성호갑 목사님은
정말 존경받을 만합니다
저도 만학을 하면서 고시의 꿈도 꿔보면서
여려가지 도전을 하였습니다만
제대로 되지를 못하더군요
이제 삶의 철학을 정리하면서
시를 쓰곤합니다
성목사님의 목소리가 광주 지구본부에서
쩌렁 쩌렁 울리는 것같습니다
그 뒤를 밟아 저도 지구본부에서 쩌렁 쩌렁 강의 를 하였습니다
그러한 선배가 있었으니
오늘\\날 통일교회가 있습니다
성호갑님의 댓글
제가 이런글을 올리는것은 불신의 광야길에선 우리의 현실에
모두가 새로운 마음의 다짐을 위한 바램에서 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입술에 죄를 범하고 죽을수 있습니까. 억울해서 .......
우리가 못하면 2세라도 왕권복귀를 완성해 놓고 만세 부르며 영계로
향 해야지요. 저는 다문화활동을 하면서 국제가정의 아품을 압니다.
제가 축복시킨 한미가정 한일가정 사연에 눈물을 ..................
글로벌시대 다문화열풍에 그들의 2세가 세계를 움직일 지도자가 되어
하나님의 축복가정에 위상을 높이고 축복가정임을 만 천하에 자랑하며
축복을 누리며 부러움의 주체가 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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