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어빵과 인생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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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붕어빵과 인생의 맛
1967년12월7일 엄동설한 매섭게 눈보라치며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추운 날...........
광주 지구본부에서 최지구장님은 나를 부르시더니 전남 보성군 별교구역장으로 가라고 명령 하셨다.
교회도 식구도 없는 별교 땅 ! 그러나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고장 벌교..
여수에서 돈자랑 순천에서 얼굴자랑 벌교에서 주먹자랑 하지 말라는 벌교
그러나 무엇이 두려우랴!
담요와 세면도구 원리책을 배낭에 짊어지고 최지구장님이 주신 돈 2,000원과 공기총 두자루를
가지고 성삿갓이 되어 무작정 별교행 버스를 탔다
차창가로 바라보이는 아름다운 경치에 취해 콧노래를 부르다보니 어느새 벌교에 도착했다.
처음 대하는 도시지만 나설지 않았다.
벌교직행버스 정류장에 내렸으나 갈 곳은 없고 참을 수 없이 배는 고프다.
붕어빵 2개를 구하여 허기는 채웠으나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데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
나는 마을 뒷산 중간쯤에 올라 산 밑 시내를 내려다보며
임지도착 보고 기도를 올렸다. ‘
아버지 제가 이곳에 첫발을 디디고 이렇게 섰습니다.
결코 못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어떤 어려운 환경이 몰려온다
해도 결코 중단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하늘이 가장 기뻐하시고 참부모님이 행복해 하실
기적을 만들어 만민에게 보여 주겠나이다.
다짐 기도를 하고난 후 아름드리 소나무 밑 편편한 곳에 담요를 깔고 하늘을 이불삼아 누었다.
겨울밤 찬바람이 살을 파고들어 밤하늘의 별들은 나를 더욱 외롭게 만들어 도저히 못 견디게 했다.
그러나 우주를 품에 안은듯 따스한 바람의 초대에 피곤은 뒤로하고 나는 잠에 점령당했다.
아침 눈을 떠보니 아침햇살이 얼은 내 몸을 녹이며 다정한 인사를 했다.
마음에 생기가 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산에서 내려와 벌교읍 거리거리를 돌아보며 거리 순회 기도를 시작했다.
마음 속에 꿈틀거리는 욕망의 속삭임을 들으며 거리를 휘졌고 다녔다.
이때부터 나는 거리를 돌아다니며 기도를 하게 되었다.
벌교상고 앞에서 학교 수없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누구를 전도할까?
사랑하는 하나님, 오늘 이 땅을 복귀할 수 있는 학생을 만나게 하소서!’ 기도를 올렸다.
약속 없는 기다림이 무척 긴장되었다.
혼자 걸어오는 여학생을 발견하고 나는 “학생!”하고 불렀다.
모르는 사람이라 깜짝 놀라 도망치려 하였다.
“나는 이 시대 새로운 희망을 전달하는 사람이다.
내 이야기 30분만 들어달라.”고 했더니 망설이다
어쩔 수없이 승낙했다. 함께 걸어가며 나는 정신없이 총서론 강의를 했다.
죽느냐 사느냐 생사를 오가는 진실의 호소를 했다.
학생(김미리)은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열심히 강의를 들었다.
다음날 만나기로 약속하고 해어졌다.
다음날 나는 최지구장님이 주신 공기총을 판매하기 위해 벌교읍 상가를 이곳저곳을 돌며 열심히
공기총 성능을 설명했다. 이날 공기총 2개를 팔았다
잠잘 곳 없는 나는 또 뒷동산에 올라 기도하며 밤을 보내고 있는데 경찰 3사람이 산위로 올라와
“손들어! 반항하면 쏜다.”하고 외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경찰들과 경찰서로 갔다.
누군가 나를 간첩으로 신고한 것이다.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전남경찰국장이 발행한 반공강사 신분증을 보여주었다. “잘됐습니다.
오늘 벌교상고에 반공강의를 해야 하는데 해줄 수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나는 허락하고 직원과 함께 학교로 갔다
학생 500여명이 강당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
국제정세로 본 한반도의 안보”라는 제목으로 1시간 30분 동안 강의를 했다.
하나님이 내 입을 통하여 역사하시고 계심을 실감할 수 있었다. 먼발치에 김미리 학생이 보였다.
깜짝 놀라 나를 바라보며 열심히 기록하고 있었다.
다음날 미리 학생이 나를 찾아 왔다.
학교에 모든 학생들이 큰 감명을 받고 선생님을 만나기를 바란다고 했다.
학생들을 나에게로 인도하도록 했다.
방이 좁아 몰려오는 학생을 수용할 수 없었던 나는 집을 얻기 위해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2층 건물을 얻게 되었다.
유리창에 세계통일연구소라고 붓글씨로 써 붙이고 아침부터 거리기도와 더불어 강의준비를 하고
학생들을 기다렸다. 오후3시가 되자 20여명의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다음날 경찰서 직원이 왔다. 벌교시내 각 사업체와 기관, 교회를 순회하며 강의하자는 것이다.
나는 쾌히 승낙하고 경찰서에서는 공문을 발송했다.
읍사무소 강의를 시작으로 신바람난 나날이 계속되었다.
벌교중앙교회 강의 날이다. 단상에 오른 나는 ‘주님이시여! 역사 하소서! 제 입이 당신 것이 되게 하소서!’
하고 마음으로 외치며 찬송가 162장을 독창하고 500여 명의 신도들에게 울부짖으며
해방신학과 변증법적 유물론강의를 했다.
마음 속으로 ‘이들 중에서 하나님이 택해 놓은 사람이 있다면 나를 알아보게 하소서! 하고 절실히 기도했다.
박수 갈채와 “아멘!” 소리, 신도들의 반응은 대단했다.
강의를 끝내고 교회를 벗어나 큰길가에 왔는데 비가 억수같이 쏟아 부었다.
앞을 보니 웬 아가씨가 우산을 쓰고 걸어가고 있다.
나는 우산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비 때문에......
미안합니다.” 그런데 그 아가씨는 말없이 한참을 걸어가다가 나를 향하여
“어쩜 그렇게 말씀을 잘하세요.” 했다. 교회에서 말씀을 들었다고 했다.
금방 대화가 됐다. 교회 이야기를 했더니 약간 망설이다가 더 말씀을 듣고 싶다며 나를 교회까지 데려다 주었다.
다음날 10시쯤 그는 교회를 찾아왔다. 오후3시까지 원리강의를 했다.
그분은 “아멘!”을 외치면서 말씀에 취해들어 왔다. 교구 수련을 이야기하고 광주에 7일 수련을 보냈다.
수련을 마치고 돌아온 후 나의 식사 준비와 학생들 뒷바라지를 해주었다.
이때부터 학생들이 정신없이 몰려들었다. 김미리 학생을 중심하고 학생회를 조직하여 간부만 20여명이 되었다.
내 환경을 잘 아는 학생들은 매일 도시락을 가지고 와서 몰래 놓고 갔다.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그 도시락을 먹으며 눈물의 기도를 한없이 했다.
학생들과 벌교상고 뒷산에 성지를 마련하고 언제나 학교를 위해 기도하도록 지시하고 학생들을 정예화해 나갔다.
벌교에 대한 보고를 들으시고 남자 1명과 여자 1명의 전도사를 보내 주셨다.
여자식구는 식사와 학생들을 접대하는 엄무를 도왔고 남자식구는 사업 활동으로 교회를 도왔다.
김충위님(120가정)이 이사를 오셔서 양복점을 개업하면서 물심양면으로 협조해주셨고
전도사들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정착을 위한 토대를 조성해갈 수 있었다.
경찰서에서 전 마을에 공문을 발송하고 파출소 직원과 함께 밤 집회를 하게 되면서 감명 받은 주민들이
교회를 찾아왔고 여자 식구를 마동리에 배치하여 마을사람을 모셔오게 하여 예배에 참여시키게 되면서
점점 교회의 면모를 세워나갔다.
최지구장님이 벌교에 순회 오셨다. 학생들이 100여명 몰려왔다.
신바람나신 지구장님의 말씀이 2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학생들이 돌아간 후 최지구장님은
이제 전남 학생부장과 원리수련소 수련 강의를 담당하라 하셨다.
얼마나 원하던 일인가? ‘세계를 내 입으로 정복해보리라.’
매일 하루에 8시간씩 강의를 했다.
7일 수련 중 처음 3일은 혼자서 강의했다.
전라남도 전 시군에서 몰려오는 수련생은 언제나 만원이었다
정성을 드려야 생명력 있는 말씀이 나온다고 생각하고 아침을 금식하며 하루도 쉬는 날이 없이
하루 8시간 강의를 소화했다. 학생들도 수없이 몰려왔다.
이젠 분필만 들면 몇 시간이고 강의할 수 있는 달변가가 된 것이다.
이렇게 최지구장님은 나를 달련시키시고 계셨고 나는 매일 꿈을 먹으며 성장해 가고 있었다.
언제 세계인을 울리고 웃길 명강사가 되느냐,
통일교인뿐만 아니라 세계인류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할 날이 오기를 열망하는 기다림의 나날이었다.
한편 나는 전라남도 경찰국 위촉강사가 되어 학교와 주민을 상대하는 강의를 하기도 했다.
강의에 감명 받은 학생들과 주민들이 내 숙소로 몰려와 제2차 강의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너무 못 먹고 쉬지 못하는 사이 내 몸은 너무 말라 45kg이 되었다.
그 시절 라면과 빵을 구입하여 강의하고 난후 간식을 마련해 주던 김정현 양을 잊을 수가 없다
빈혈이 심하고 기운이 너무 없었다.
'내 소원은 인류평화와 위대한 조국창건이다.
민족이 하나 되어 통일을 열고 동북아의 중심에서 위대한 대한반도를 만드는 것이 대 목표다.
그 길은 오직 국민교육뿐이다. 나는 죽으면서도 강의할 것이다.'
대망을 품고 고향에 첫 발을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무서운 집념의 날개를 펴고 절박한 마음의 인도 따라 한의 눈물을 감추고
마음 속에 이글거리는 욕망을 짓누르며 6년 만에 고향을 찾았다.
대학등록금이라는 명목으로 받아든 200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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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철님의 댓글
아무리 글자가 빽빽이 차 있어도, 가슴으로 읽는데는 아무 지장이 없다.
나는 감동을 참아야했다.
다 읽지도 않았는데 감정이 폭발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당사자의 절박했던 심정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나는 행간을 읽으려 애썼다.
겉으로 들어난 실적을 읽으면 괜히 신이 났지만
그 속에 숨어있는 눈물로 범벅된 정성을 놓칠 수는 없는 것이다.
지금은 새벽이 다가오는 2시 16분.
나의 취침을 방해하는 성호갑회장의 우렁찬 외침소리에
아직도 내 베개는 멀리 가고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새역사는 밝아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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