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에 날개단 웅비의 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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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에 날개단 웅비의 세월
1978년 겨울밤이 달빛에 익어 온세상이 평하로운 시간 고등학교 시절 처음 만나 내몸이 자석에 붙어버린 듯 감명을 받으며 강연을 들었던 사랑하고 존경하는 최용석선생님으로부터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일본과 미국에서 활동을 전개하시다 이제 한국 국제승공연합 이사장으로 발령되어 오게 되었는데 서울에 올라와 본부애서 함께 활동하지 않겠냐고 물으셨다.
나는 아내와 자식을 보성에 남겨둔 채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나의 보직은 조사부장이였다. 나는 이사장님의 사랑에 보답한다는 생각으로 낮도 밤도 없이 전국을 누비며 활동했다. 그러나 서울에 올라온 나는 경제적 여유가 없어 집을 마련하지 못하고 사무실에서 3개월을 기거했다. 나의 살림살이는 고창 아산 집으로 보내고 여동생 귀매는 혼자 보성 월세방에 남겨둔 채 나의가족은 잠시 처가인 충북보은으로 이사를 했다.
화연이는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고 현국이와 갓난아기 보경이는 엄마와 함께 있었다.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운 계절을 지나야 했다. 처가에 갈 때마다 장인 장모님 뵙기가 너무 민망했다. 이 넓은 서울 천지에 내 몸이 머물 곳이 없다. 3개월을 사무실에서 낮과 밤을 보내다 보니 사랑하는 부인과 자녀들이 한없이 보고 싶었다. 밤이면 텅 빈 사무실에 이불도 없이 새우잠을 자며 가난에 비극을 맛보며 긴 겨울밤을 보냈다.
이 때 마침 처남이 서울에 올라와 처남 방에서 함께 기거 하였다. 비록 처남 방이지만 남들처럼 퇴근할 수 있어 행복했다. 누군가 이 사실을 이사장님께 보고 하여 이것을 아신 최이사장님은 나에게 700만원의 사비를 지원해 주시고 운전도 할줄 모르는 나에게 정길진차장을 기사로 승용차도 하사하셨다.
마음으로 나를 아껴주신 이 분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지방출장에 여염이 없고 어려운 살림살이를 아내혼자 책임졌다. 옆 슈퍼에서 외상으로 물건을 가저오고 월급날에 지불하였다. 이때 아내는 자동차 운전면허증을 따냈고 화연이는 증산초등학교에 현국이는 명지유치원을 다녔다. 나는 이사장님 특별명령으로 본부와 지방 조직보강 활동에 여염이 없었다.
조직의 최 일선에서
나는 30일 동안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여 우리 단체 활동의 현주소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전국 지도를 놓고 전국상황을 상, 중, 하로 분석해가며 데이터를 만들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이사장님과 본부 국장 및 직원앞에서 설명하니 모두가 어리둥절했다. 이사장님은 나에게 대단한 판단력과 인물을 발굴하는(조직의 명수) 천재라고 호평해 주셨다.
그리고 얼마 후 꿈에 큰 산이 하늘에서 내려오더니 내 머리에 드리워졌다. 그 후 나는 사업조직국장으로 인사발령 받았다. 최연소 국장이 된 것이다. 재단에서는 이 인사발령을 인정할 수 없다고 6개월 동안 부장 월급을 주었다. 나는 직급과 급료에 상관 없이 전국 253개 시군을 돌며 읍면동 지부장회의를 개최하며 읍.면.동 조직활성화를 위하여 시군지부장을 협조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밤12시에는 각 시군 상황보고를 했다. 그리고 정치인을 많이 만났다. 여의도에 사무실을 만들어놓고 최이사장님을 모시고 여 야국회의원 장관도 만나고 호남출신 정치인을 만나 활동을 위한 기반을 조성했다. 큰 정치지도자와 관계를 위하여 나는 김대중 선생을 만나기 위하여 증산동시절부터 마포 선생의 집근처를 6개월 가까이 청소하였다
비서관에게 수없이 문전박대를 밭았는데 어느날 김대중선생과 길거리에서 만나 집에 초대되기도 했다. 그때 군대시절 웅변대회중 선생의 4대강국 안보보장론을 주장하여 군 자대영창에 3개월 있었다고 말하여 특별한 애정을 표시해 주셨다. 3년후 다시 비서관의 소개로 존경하던 김대중 총재를 또 만났다. 총재님은 정치입문을 권유하기도 했다. 그러나 통일교회를 탈퇴하는 조건이였다.
그 후 총선때는 당선가능한 여야국회의원 후보를을 많이 만났다. 그렇게도 길을 열어주시려 부족한 저를 도와주셨던 존경하고 사랑하는 최이사장님을 영원히 잊을수가 없다. 살아계셨으면 국회의사당에서 참부모님이 메시아임을 만천하에 선포하자고 하시던 약속을 실천할수 있을것인데 오늘도 아쉬워 이렇게 외로운 눈물의 밤을보내며 입술을 깨물고 내일을 응시하고 있다.
나는 전국 지부장단 일본연수를 전담했다. 제1차 연수생을 인솔을 하게 되었는데 큰아버지 부역문제로 비자가 나오지 않았다.
상황을 보고 받은 최이사장장님은 당시 비자담당이었던 최국장을 향해 성호갑의 비자를 못 만들면 이번 해외연수는 전원 취소라고 하셨다. 회장님의 배려와 사랑에 감격하여 어떤 일도 해 낼 수 있는 새 힘을 얻었다.
지도자의 인정과 사랑을 받으면 얼마나 큰 효과가 있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1979년 부모님 탄신일 행사가 본부교회에서 진행되었다. 행사 중 화장실에서 최이사장님을 뵈었다. 인사를 드렸더니 반가워하시며 호갑이 금년에는 만사형통하고 내 등 타고 세계로 날아라. 하시며 세배 돈을 100만원을 주셨다. 정말 이사장님은 나에게 너무 많은 것을 주셨다. 그 은혜를 갚아야 하는데 영계에 계시니 정말 아쉽다. 사모님에게라도 잘해 드려야지 다짐해 본다. 내가 뭐라도 드릴까봐 피하시는 사모님.................. 죄송합니다.
세계85개국 순회 지구가 너무 좁아
《지구를 돌고 돌아 80마일 》
1980년에는 최이사장님의 추천으로 유럽 15개국과 미국50개주를 돌아볼 수 있었다. 그 시절에 남들은 비행기 타보기도 힘든데 나는 세계를 날아다니는 행복한 나날 이였다. 어느 나라를 가던 밤이면 고창군 각 읍면동 지인 3.000명에게 밤잠을 설쳐가며 활동내용을 담은엽서를 보냈다. 한국을 넘어 세계를 돌아보면서 나는 새로운 시각을 얻을 수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대한민국 고창만 생각하고 살았구나. 세계가 이렇게 넓은데 우물안 개구리였구나. 세계를 생각하며 세계적인 비전을 세우고 활동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이젠 세계를 향해 날아보고 싶었다. 이제 나는 세계인류를 위하여 봉사하고 희생하며 살맛나는 미래를 설계하는데 시간을 아끼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내가 진작 고창을 떠나 서울에서 최이사장님을 모시고 활동했다면 이사장님 등을 타고 세계로 날을 수 있었을 것인데 아쉬움이 나를 더욱 불안하게 하였다.
1981년대에는 중동, 아시아, 오세아니아. 남미등 50여국을 순회하며 여행을 했다. 지금 생각해도 그 시절이 황홀하다. 이렇게 지구를 몇 바퀴 돌며 지도자들을 만나고 회원들의 환대를 받았다. 각 국 최고의 호텔에서 잠을 자고 각국 최고 음식을 대접받는 삶이 이어졌으니 어찌 감사 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지금도 고생만한 부인과 함께하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다.
자녀들 학비한번 챙겨주지 못한 채 부인에게 맡기고 세계를 돌아다녀도 불평 한 마디 없이 오로지 남편을 위하여 희생하고 시댁에 봉사하는 아내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결혼 이후 고향에서 잠시 신혼의 세월을 보냈을 뿐 우리 부부는 젊은 시절을 거의 떨어져 살았다. 이렇게 나는 세계여행을 60마일 정도 했다.
욕망의 세월에 인생을 초대하고
그 이후 나는 전라북도 지부장으로 발령이 되었다. 방장산에 묻은 한을 풀고, 세계를 돌며 수많은 지도자와 회원들을 만나면서 얻은 경륜과 지식으로 전북도민을 사랑하고 위하며, 나라를 선진국으로 만들기 위한 업적을 만들어 보리라 생각했다. 전북예술회관에서 이 취임식을 최용석이사장 도내기관장 시군지부장등 400여명이 운집 취임식을 개최하였다.
나는 이자리에서 한반도 통일과 지구 한가족을 만들기 위하여 기적을 만들어 내겠다고 말하고 우리가 최선을 다 하면 나라를 위하여 숨져간 애국지사들이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여 많은 박수를 받았다. 여기에서 끝장을 보겠다고 다짐하며 다음날 부터 정신없이 전라북도 14개 시군과 읍면동을 뛰어다니며 책임자를 만나고 조직하고 강의했다.
전라북도 도지사와 경찰국장, 법원장의 협조를 받아 교육을 성공시켰다. 나는 언제나 모든 예산의 10%를 섭외비로 활용한다. 관의 힘을 최대한 활용했다. 고창을 방문 할 때는 경찰국 대공과장이 고창경찰서에 전화해서 마중을 나오도록 했다. 승용차도 그랜저로 바꾸고 번호도 7300으로 하여 경찰국에 가면 정문에서부터 인사를 하며 국장실로 안내되었다. 도청도 마찬가지다. 섭외의 기대를 설정해 놓고 대대적이고 본격적인 전 시군 읍면 동 조직으로 들어갔다.
시 군지부장단. 시군 여성회장단. 청년회장단을 만들어 리.통.반으로 조직을 확대하고 2년째 사업으로 조직원정예화 및 회원2배가 달성을 목적으로 일만지부장단 전진대회를 개최할 것을 시군지부장 회의에서 결정하고 장소를 경남 창령 부곡화와이로 정해놓고 나는 각 시군을 돌며 시군지부장을 독려하고 시 군지부장이 면지부장을 독려하고 면지부장이 자전거 오토바이 트럭을 타고 마을을 순회하며 리 책임자를 선정하고 움직여 모든 회원으로 하여금 최선을 다하여 활동하게 했다.
전라북도에서 부곡하와이까지 3시간 걸리니 왕복 6시간이 걸리는 길이었다. 대한관광여행사 사장의 협조와(버스비 활인. 피아노. 대형세계지도 기증) 사무실 직원의 피눈물 어린 노력으로 일인당 회비 10,000원씩을 받고 버스 221대 연인원 11,874명이 참석하게 되는 기적을 만들어 냈다. 관이 주도하는 교육도 아닌데 정말 한 시대의 역사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 기적은 모든 이의 희생과 보람의 열매였다.
전라북도 경찰국 정보과 직원은 우리사무실에 상주하면서 내무부에 매일 보고를 했다. 관이 아닌 민간단체의 조직적인 인원동원에 놀랬다. 경찰국장실을 방문하면 국장님은 내 등을 두둘기며 대단해 정말 대단해 성지부장은 생각이 남달라 하시면서 칭찬하셨다. 최이사장님은 서울 롯데호텔에서 전국 도지부장 회의를 개최하셨다. 이 자리에는 재단간부 교구장. 도지부장. 각 사업체 사장들이 모여 엄무보고를 하는 자리였다.
갑자기 이사장님은 나를 불으시더니 이번 일만지부장단 전진대회 결과보고를 하라고 하셨다. 나는 이번 대회의 목적 비전 그리고 활동에 대하여 자세하게 보고하고 이번 교육은 회원들이 회비를 내 총 경비 1억3,000만원 정도가 소요 되었다고 보고 드렸더니 참부모님은 잘했다. 성호갑이 배짱좋지 ! 더 큰일을 해야해....... 1억이 많은거야 시시하다.
성호갑 임자가 언제나 제일 똑똑하고 최고라고 생각하지 ...나는 그때 아버님에게 교만한자로 보인 것이 지금도 가슴 아프다. 큰일을 해놓고 더 잘하지 못함에 얼굴을 들지 못했어야 했는데 나를 나타내기에 급급했으니 얼마나 어리석었나. 하나님이 창조한 존재물중 인간보다 나중에 만들어 진 것이 하나도 없으니 사람을 대하거나 자연을 대해서 교만하면 안 되며 언제나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우수하다고 생각하면 더욱 안 된다고 다짐 했다.
만민을 아벨로 생각하며 누구에게나 배우며 살겠다고 다짐했다. 그 후 제도가 바뀌어 각도에 승공연합 도지부장과 교구장을 하나로 통합하여 교구장이 전체를 통솔하게 되었다. 도지부장과 교구장중에서 교구장을 임명했다. 한남동에서 환고향한 전라북도 출신 교구장과 승공연합도지부장은 송영석 나 그리고 김경옥 이였다 3사람 중에서 한명을 선택하게 되었다. 3사람을 일어세우고 아버님은 물으셨다. 누가 싸움도 잘하고 실력도 있나. 그 순간 최용석 이사장님이 일어나서 전북은 성호갑이 기반이 막강합니다.
기회를 놓치고 방황의 계절에
성호갑의 섭외능력과 강의실력은 아버님도 인정 하시지 않습니까? 전북은 성호갑이 적격자입니다. 몇 번이고 말씀을 드렸다 .결정을 못하시고 1시간정도 지난 후에 누가 선배야? 송영석입니다. 송영석이 하지 최용석 이사장님은 아버님... 성호갑이는 미국으로 발령해 주시지요.
그 후 전국 도 단위 연수원을 건축하시려는 계획아래 나는 경원연수원 부원장으로 발령이 되었다. 강원도 경기도 인천을 돌아보며 연수원 부지를 물색 하기위하여 3개도를 돌아다녔다. 급료는 재단에서 지급되었지만 활동영역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차라리 공직을 떠나 고향에 돌아가 국회의원에 출마하고 싶었다.
이것을 아신 최용석 박사님은 미국벨베디아와 이스트가든에 계신 아버님을 찾아 내 조직적인 기반과 활동을 설명하시며 성호갑이 출마하려고 하니 허락해 달라고 말씀을 드렸다. 1시간을 기다려도 말씀을 안 하시고 어머님만 당선될 수 있느냐고 물으셨다 한다. 그 후 서울에 있는 지인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국회의원에 출마하면 경제적 지원은100% 하겠다고 고향의 선후배들도 출마를 권유 했다. 나는 공직을 접고 출마하려 생각했다.
한과 영계의 눈
한남동에서 아버님을 중심하고 공직자 집회를 끝내고 박충남목사와 설용수원장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기위하여 신 바람나게 한강로를 달렸다. 서울 야경에 취해 감격의 마음을 달래며 속도를 더 했다. 한양대학교를 지나 한양대 다리를 지날 무렵 앞에서 달려오는 차와 정면으로 부딪치려는 순간 박목사는 핸들을 갑자기 오른쪽으로 돌려 자동차가 넘어 가는 순간 나는 의자를 움켜쥐고 하나님 나는 죽을 수 없습니다. 억울해서 못 죽습니다. 이렇게 제 인생을 끝내시려 대학을 집어 던지게 했고 그 고생을 다 하게 하셨나이까.
하나님 당신이 그러시면 안 되지요 그러나 나는 앞 유리창을 깨고 길가에 나딩굴었다 . 나는 정신을 잃고 119구조대에 의하여 한양대 병원 응급실로 옮겨졌다. 2일 만에 정신을 차렸고 의식이 돌아와 의사의 이야기는 눈을 크게 다쳐 두 눈이 다 실명이 될 수도 있다고 했다. 두 눈이 실명이 된다면 나의 미래는 어떻게 되며 눈 못 보는 아버지를 둔 아이들과 부인이 얼마나 불쌍할까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져 견딜 수가 없다.
나는 3개월을 침대에서 움직이도 못하고 있어야 했다. 돌보아줄 사람이 없는 철없는 애들은 친척들의 도움을 받으며 구의동집을 지키며 자기들끼리 생활하고 있었다. 어린 화연이가 엄마처럼 한양대병원을 동생들과 오가며 동생들을 잘 보살폈다.
화연이는 언제나 자상하고 대견하다. 언제나 내 마음에 기쁨을 준다. 수술을 하기위해 수술실로 향하는 나를 바라보는 아내의 다정스런 눈과 따뜻한 손을 잡으며 걱정하지 마오. 내 이렇게 쉽게 무너질 내가 아니다 기도하라고 당부하며 수술실을 향 했다 나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하늘이여 왜 나에게는 대업을 맡기지 않고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10시간에 걸친 대 수술을 마치고 병실로 돌아왔다. 그러나 움직이면 눈을 버린다고 절대 움직이지 못하게 손을 묵고 30일 동안 아내가 숟가락으로 밥을 입에 넣어주는 생활을 해야 했다. 나를 찾아와 안마를 해 주시던 삼위기대(김희자)와 정증남님께 지금도 감사할 따름이다. 수술 후 30일쯤 되었을 때 볼 수는 없는데... 왠 여인이 내 발 옆에 서있다. 순간 인어로 변하더니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두 눈을 가리고 있으니 나에게는 낮도 밤도 없다. 면회를 와도 두 눈을 가린 채 목소리 면회를 해야 했다. 정말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다. 60여일이 지난 후 꿈에 음성이 들려왔다 호갑아 나를 따르라.... 나는 그 목소리를 따라 어느 정자나무 옆을 지나려 하는데 참부모님이 계셨다. 나를 따르라 어느 높은 산으로 인도 되었다. 얼굴을 들어 저 하늘을 보라..... 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휘황찬란하고 이 세상에 그렇게 아름다운 하늘을 본적이 없다.
호갑아 보이느냐 예 보입니다. 너는 보게 될 것이다. 걱정하지 말라 그 후 3일이 지나 나는 다시 수술실로 들어가 수술결과를 확인하는 순간 이였다. 의사가 소리를 질렀다. 기적이 일어났다 이럴수가 의사는 내 손을 잡더니 기적입니다. 의사 15년에 처음입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그렇게 참을성이 강하십니까. 수술 후 치료할 때마다 아플 것인데....... 이런 분은 처음 뵈었습니다. 정신력이 대단히 강하십니다.
최이사장님은 5일에 한번정도 밤 늦게 병원을 찾아 주셨다. 3개월10일 만에 퇴원하여 한남동을 방문했더니 아버님은 죽을 사람이 살아 왔구만 하셨다. 왜 하나님은 나를 죽이시려 하셨을까 ? 내가 가야할 길은 하나님의 주권을 찾는 하늘길인데 세상길 정치의 길을 가려고하니 하나님이 죽음 길로 인도하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요나에게 니네베로 가라고 했을 때 그 곳 사람들이 사납기에 겁을 먹은 요나가 명령을 어기고 다른 곳으로 가려고 하니 바다에 집어넣어 고래 배속에 들어가서야 깨달았던 요나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다시 공직의 길을 가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학사교회 경기인천교구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아버님은 새 자동차(소나타)를 하사하셨다. 그저 감사하며 나를 버리고 하나님을 모시고 절대순종하기로 다짐하고 새 출발을 했다 수원에 본부를 두고 대학생을 중심한 교회를 만들었다 수원교회에서 일반식구 15명을 인수받아 본격적인 활동에 임했다. 초등학교 교감인 이영백 선생님 그리고 송정일 장로님이 주동이 되어 교회를 정상으로 끌어 올려놓기 위해 최선을 다 했다.
그러나 대학생을 중심한 활동을 하기위하여 마련된 건물이라 우리 가족이 기거할 방이 없다 어떻게 할까 망설이고 있는데 사촌형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서울 구의동 우리 아파트가 재개발이 된다는 것이다 지금2층인데 21층으로 지어진다는 것이다. 너무 기뻐서 하늘을 날을 것 같다. 2,700만원에 산 아파트인데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파트 재건축으로 주신 물질축복
당신이 이렇게 제 갈 길을 준비해서 열어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이주금 3,000만원을 지급 밭아 수원 정자동 교회부근에 2,000만원으로 단독을 구했다. 집에서 교회까지는 4분 거리였다. 밤이면 수원 시내를 돌며 기도하고 낮이면 심방으로 최선을 다 했다 예배는 80여명이 되었고 철야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는 식구가15명 정도였다. 그런데 갑자기 집주인이 오더니 집을 비워달라고 했다.
할 수없이 집을 구하려 다니다. 정자동 백조 아파트를 구하게 되었다. 어느날 농협에서 전화가 왔다. 집주인이 아파트를 담보로 돈을 썼는데 지불 능력이 없으니 집을 비워 달라는 것이다. 나는 농협과 타협하여 3,000만원을 주고 아파트를 구입하였다. 아파트시세는 2700만원 이였다. 집주인과 상의하여 300만원 현금 보관증을 받고 이전등기를 끝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이 주신 두 번째 집을 마련하게 되었고 화현이가 이화여대 국문과에 합격하였다. 학교에 한이 많은 나는 너무 기뻐 수원성을 돌며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화연이 태어날 때 꿈을 생각하며 큰 인물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 하였다
이제 외적인 기반을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도교육위원회를 방문하여 장학사와 도교육감을 만나 초중고 선생님 이데올로기(김일성 주체사상비판) 교육을 시키자고 했다. 처음은 반대했지만 청년연합의 전국교사교육 내용 사진첩을 보여주며 설명했더니 교육감은 400명을 약속했다.
나는 신바람이 났다. 정도의 길을 걸어가면 생각한대로 이루어지는구나. 하늘이여 나는 당신과 더불어 기적을 몰고 다닙니다. 어떤 것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쳐 흘렸다. 운전할 줄 모르는 나는 학사교구 경기대학생을 운전수로 400명의 교사를 관광버스 10대로 뒤따르게 하고 신명나게 경남 창녕부곡하와이 교육장소로 달렸다. 그런데 대전을 지나서 옥천부근을 지나갈 무렵15m 낭떠러지로 승용차가 딩굴었다.
나는 기절하여 대전 병원에 옮겨졌고 승용차는 완전 걸래가 되었다. 승용차를 본 사람들은 어떻게 사람이 다치지 않았는지 몰 으겠다고 혀를 내 둘렀다. 하루만에 깨어난 나는 병원을 출발하여 부곡하와이계신 참부모님께 달려가 인사와 교사교육 상황보고를 했다.
아무말씀도 하시지 않고 탕감이 끝나간다고만 하셨다. 하나님은 나를 죽을 고비에서 두 번이나 살려주셨다. 내가 공직을 떠났다면 나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젠 꿈도 욕망도 다 버리고 이름도 빛도 없이 충성하겠다고 다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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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노숙님의 댓글
최용석 이사장님은 정말 멋진분이셧나 봅니다 저는 입교가 늦어서 그분이 왕성하게
활동 하시던 때는 식구가 아니었습니다. 입교후 일본 식구들을 데리고 제임지에
한번 오셨는데 36가정으로서 아주 대단히 활기차구나 하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분 막내 동생은 뉴저지에 살고 제 왕펜이기도 합니다 . 그런데 목사님 부탁이 있습니다
글의 내용은 대단히 은혜스럽고 요즘의 우리에게 심령을 이르키는 훌륭한 내용이나
읽기가 힘듭니다. 두줄쓰시고 엔터를 치시고 두줄씩 떨어지게 하시면 읽긱가 편하고요
그리고 글을 서너번 나누어서 연재로 써주셔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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